풍요의 역설
“인생에는 두 가지 고통이 있다. 피할 수 있는 고통과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피하려다 실패할 때 오는 고통이다.”
인류는 풍요로운 시대를 지향해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류가 지향한 풍요로움을 달성하자 거꾸로 인간은 불행해졌다. 더 이상 고생해서 만들어야 할 신세계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젊은이들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 까닭에 불행해진 것이다.
풍요는 사람들에게 여유를 가져다준다. 이 여유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물질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다. 그 여유는 어떻게 쓰일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좋아하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현대인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생산에 의존하고 생산은 충족되어야 할 욕망을 만들어낸다. 여유는 ‘좋아하는 일’을 위해 사용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좋아하는 일이란 ‘바라고는 있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이 아니라 산업이 창출한 욕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각과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인식체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주체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수용자들이 무엇을 받아들일지를 먼저 알아차리고 미리 결정된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이 내가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산업에 의해 ‘좋아하는 것’을 제공받는 꼴이 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도시 노동자의 한가함이 산업에 의해 착취되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동력이 되었다. 왜 한가함이 착취될까? 그것은 인간은 지루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가함을 얻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른다. 그 한가함 속에서 곧 지루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제공된 바쁨과 준비된 쾌락에 몸을 맡기고 비로소 안도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루함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그리고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