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작용 의례
사람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사회적 만남을 가진다. 그리고 이른바 노선을 정한다. 다시 말해 남들의 평가에 대처하기 위해 자기가 남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지를 항상 염두에 둔다는 말이다.
여기서 체면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체면은 개인이 남들에게 인정을 받을만한 존재로 스스로를 나타내는 자아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체면을 매우 중시한다. 체면에는 감정이 실리는데 체면이 유지되면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지만 예상치 않게 체면을 세울만한 일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체면이 깎일만한 사건이 생기면 기분이 몹시 상하기 마련이다. 체면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의 체면에 대해서도 감정이 생긴다. 그래서 집단에는 이와 관련한 질서와 규칙이 생기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과 만나는 동안 나의 노선은 대체로 이 질서에 따른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체면이 구겨진 사람이거나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일 것이다. 체면을 적절히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체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으레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 마련이다. 사회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일단 자아 이미지가 체면으로 드러나면 그 사람은 그것에 맞게 처신할 것을 요구받는다. 물론 다른 사람의 체면도 지켜줘야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한 집단 내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체면이 모두 유지되도록 처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호승인이 인간관계에서 상호작용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는 마음에서 진정을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 실제로는 동의하지 않아도 일시적으로 비위를 맞춰주는 작업상 승인이다. 이런 상호승인은 만남을 보수화시키는 주요결과를 초래한다. 일단 한 사람이 어떤 노선을 연출하면 모두가 그 노선에 맞추어 반응한다. 노선에 발목이 잡히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노선을 바꾸거나 의구심을 나타내면 혼선이 생기고 다른 참여자들은 방어 행동에 돌입한다.
체면 유지는 상호작용의 조건이다. 운전하기 위해 교통규칙을 배우듯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체면 지키기를 배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체면 지키기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체면과 일치시키려고 취하는 행동을 뜻한다. 누구나 체면 지키기와 관련한 경험이 있을 것이고 이를 활용한 적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선 이를 사교술이라고 하고 외교적 수완이라고도 한다.
한 사회의 의례 질서는 이런 노선협조를 기초로 조직된다. 다른 사회질서와는 다르다. 사실이나 정의는 학생의 세계에나 있는 것이다. 의례 질서의 주된 원리는 정의가 아니라 체면이다. 개인은 의례를 통해 감수성과 감정 체면을 표현할 자아를 배우고 긍지, 명예, 위엄, 배려 요령과 침착성을 배운다. 인간이 되려면 거치는 이 과정이 한 개인을 규정한다.
어빙 고프만은 이 의례 질서를 거짓된 것으로 보았고, 이렇듯 연극적으로 자신의 내면적 자아를 숨기는 상호작용을 증오했다. 이 의례의 붕괴, 즉 권위주의적 상호작용 질서로부터의 탈피야말로 사회질서를 아래로부터 변화시키는 추동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68사태 때 동료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을 학생들이 점거하여 망쳐놓은 것을 보고 “오 마이 갓, 인간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나요?”라고 하자 “제대로 된 사회학적 질문은 어떻게 인간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들이 이런 행동을 이토록 드믈게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권위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어떻게 권위 밑에 엎드려 지옥을 잘도 지키면서 사는지, 묻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유지되는 것이다. 그것이 좋든 싫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