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니샘 Nov 12. 2019

왜 아이들은 '공부하기'를 원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교육하는가? 

학문적 수월성을 위해? 학자를 만들기 위해? 절대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사실 3R을 비롯하여 학문적 기초에 다름 아니다. 


수학을 왜 배워야 하나요? 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번 생각해보자. 

1학년에서 배우는 것은 2학년의 기초가 되고 3학년에 배우는 것은 4학년을 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달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실 사회에서 이런 내용들은 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지루한 12년의 과정을 참으면서 즐겁게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것, 학문의 기초를 닦는 열정적 학습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문제다. 다수에게 이것은 매우 고역이 된지 오래다. 과거에는 중도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그만두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도에 그만 두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1794년 런던 뉴칼리지 설립에 즈음한 조저프 프리스틀리의 헌정사를 인용한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여러분을 담당하는 교사의 자질과 상관없이 실력이 나아지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교사들은 여러분을 위해 생각하거나 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여러분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일하는 최선의 방식을 겪도록 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 자신의 근면함으로 획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힘으로 수집하고 생각한 전제들과 자료들로부터 모든 결론과 원리들을 스스로 구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놓일지 모를 모든 편견들을 제거하고, 생각의 진정한 자유와 형평성을 위한 가장 넓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 학교의 위대한 목표입니다.”

프리스틀리의 말을 요약하면 “생각의 자유와 형평성을 위해 스스로 학습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을 위한 가장 넓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학교교육의 목표다. 


학교교육이 학생들의 부지런함에 의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끌어내야만 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빠지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무엇을 좋아하는 아이는 똑같은 것을 수십번도 더 반복하면서도 지루해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도 미술관에 갔을 때 관람시간이 다 되어서 무엇을 보지 못하면 다음날 기꺼이 다시 가서 본다. 이런 나를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만 배우고 다른 것들은 무시해도 좋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공부할지 결정할 때 단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문제다.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과목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배움의 전통을 창조해야 한다는 말은 소수만이 지루해하지 않고 소수만이 진지하고 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는 오랜 교육의 전통을 새롭게 대체하자는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했을 것이다. 단지 정해졌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가르치자는 말이다. 


나는 모든 아이들이 지성인이 되기를 바란다. 법률가, 의사, 교수, 건축가뿐만 아니라 미용사, 배관공, 그리고 청소부조차 자기 시대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서게 하는 것 말이다. 우리가 기르고자 하는 사람이 왜? 라는 왕성한 질문과 호기심을 가진 시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진짜 공부’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의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는 공부가 ‘패턴’과 ‘색다른 것’, 그리고 ‘아주 작은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 면밀한 관찰력을 기르는 것이라면 어떨까? 회의적 태도와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에 더해 즐기는 태도, 즉 상상하고 궁금해하고 새롭고 흥미로운 방법으로 종합하는 능력을 장려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이해하는지 상상하는 습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습관을 갖추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교육원리가 되어야 한다.  사실과 증거를 존중하고 좋은 자료와 나쁜 자료를 구분해내고, 사실 확인도 없이 큰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글과 말에 능숙한 사용과 더불어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신중하게, 설득력 있게, 그리고 강력하게 의사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게 하는 것을 추가하고자 한다. 또한 정의로운 입장을 취하고 그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연대하고, 세상과 우리 이웃 충분히 배려하는 것과 더불어 어려움을 끝까지 견디고 나의 일을 성실하게 완수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공동체든 서로 믿을 수 없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략한 수업 목록은 의도된 학문세계의 특수한 교과체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교과를 뛰어넘을 때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것이 교과교육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효과적인 우리의 대안은 전통적 학문적 교과과정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것을 출발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적 교과를 공부하는 것이 학교교육과 동의어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사례로 간주한다면 우리에게는 보다 많은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즉 다른 것들을 우리의 ‘배움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한달동안 공부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자세히 검토하고 역사, 문화, 사회, 정치, 문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연구가 이런 주제를 공부하는데 활용된다. 이런 공부는 당연히 교과를 뛰어 넘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분절된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싶고 필요한 것을 종합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 왕초보에 불과하다. 사실 이러한 공부가 대학을 들어가는데 소용이 안될까봐 걱정되기도 한다. 또 이런 공부가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쓸모있을까에 대해서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제약한다. 그러나 교육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가르치는가이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간낭비에 불과한 실험에 몰두하는 오류를 저지를 수도 있다. 아이들이나 교사 모두 실제에 뿌리를 둔 배움의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아이들 모두를 배움에 몰입하게 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배움에 요구되는 노력은 학생들의 근면이다. 학생들이 기꺼이 배우려는 부지런함을 끌어내는 것은 바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배우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교육의 온상, 영재교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