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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니샘 Apr 19. 2020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교육

만일 우리가 과거로부터 무언가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면 그냥 지나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참고 견디어 내야 할 것이다. 그건 아마 더 좋지 않은 일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한 말로 지금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말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조금만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예견하고 대비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비슷한 일로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혼란을 최소화하고 그 상황을 극복하는데 있어 세계의 모범으로 찬사 받고 있다.      


우리는 교육의 담당자로서 미래를 살아갈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있다. 따라서 미래를 예견하고 그것에 맞는 교육을 하는 한편 미래세대에게 보다 바람직한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현재를 보다 좋게 변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과거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를 혁신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번 코로나19사태에서 그 답이 분명해졌다. 바이러스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에서 보란 듯이 극성을 부렸다.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속성을 가졌으며 그런 사회를 만났을 때 날개를 단 듯 더욱 더 활개를 쳤다. 그에 맞서는 인간 사회는 자율적이든 전체적이든 통제로 맞설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 못한 곳은 그야말로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각국이 코로나19를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율적 통제로 맞서는 것이고 하나는 전체적 통제로 맞서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처럼 무력하게 방치하는 나라도 물론 있기 마련이지만 이 둘의 범주로 분류한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 할 것이다. 비록 선의의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전체적 통제를 택했다. 별다른 대처 방법이 없어서이던가 아니면 그 사회가 본래부터 전체적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쌓아왔던 민주화의 전통에 따라 자율적 통제를 택했다. 이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우리가 강조하지 않아도 세계적 찬사와 뒤늦게 우리나라를 뒤따르는 나라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사실 두려운 사태, 즉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은 코로나로부터의 위험이 아니라 통제적 봉쇄로 인한 경제의 몰락, 즉 대공황이다. 전체적 통제는 코로나 확산을 막을 수 있을지언정 경제적 불안은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선택지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본래적으로 전체주의적 사회는 완전 통제가 가능하고 사회 자체가 계획 사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신속한 통제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로 인해 중국은 신속하게 코로나19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적 국가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전체적 통제는 사실 이들 나라엔 낯선 일이다.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가면 갈수록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자율적이며 민주적인 국가 시스템은 그것이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시민의식이 높다 하더라도 위기를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전체적 통제의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불안의 확산은 쉽게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펜데믹보다 위험한 인포데믹을 우리는 눈 앞에서 보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서구의 시민들이 사재기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통제가 무너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나라 역시 뒤늦게나마 민주적 통제 방식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들에서 충분히 가르침을 얻어야만 한다. 민주적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도 갈 길이 멀다.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전체적 사고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계 일각에서 보여준 각자도생의 모습도 반성해야만 한다. 자율성의 부재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침이 없으면 행동도 없다는 복지부동의 관행이 교직사회 곳곳에 만연했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보여주어야 할 창의성도 부재했다. 우리가 그렇게 외쳤던 교육의 공공적 가치가 빛을 발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했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을 어렵다. 그러나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를 바탕으로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미래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플랜B가 가능하다. 예상외의 난관이 우리를 막는다면 우리는 차선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가는 미래는 사실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다. 계획이 없다면 말이다. 어떤 경우든 미래의 최악을 막을 수 있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과거를 꼼꼼히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또다시 피할 수 없게 될 터이니 말이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우고 현재를 개선하며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이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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