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역설
박솔뫼의 소설 <우리의 사람들>을 다 읽었다. 모호한 안개 속을 헤치고 나온 듯하지만, 남는 여운은 꽤나 선명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문득 모든 것이 뒤엉킨 듯한 감각을 마주하곤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눈을 떴을 때, 혹은 긴 꿈에서 깨어나 기억을 되짚으며 멍한 상태에 머물 때처럼.
그러다 눈앞의 사물들이 차츰 익숙해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인지한다. 박솔뫼의 소설은 바로 그 '인지'의 찰나를 닮아 있다.
타인의 집에서 산다는 것, 그 존재론적 불안
소설 속 인물들은 자기 집이 아닌 '타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타인의 공간에 머문다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 불안과 함께 한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언어와 맺는 관계와도 맞닿아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으나, 정작 존재는 그 집의 소유권 없이 늘 낯선 곳을 유랑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불안은 불청객이 아니라 '항상적'인 상태 그 자체다.
이 존재론적 불안은 개인적인 층위를 넘어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불안은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가보지 못한 곳을 다녀온 듯 깊이 이해하고, 보지 못한 풍경을 본 것처럼 감각하는 것. 이것이 픽션의 한계이자 본질이다. 이야기는 늘 반복된다. 모든 이야기가 이미 어딘가에서 발화되었고 언젠가 다시 이야기될 것이라면, 그것들을 선형적인 시간 축에 배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과거와 현재는 그저 겹쳐질 뿐이다.
전해지는 말은 늘 변형이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연결'이라는 형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길을 걷다 마주치는 무수한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산책은 그곳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만나고, 그것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 된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그릴 때, 우리는 그들의 부재를 부정하거나 환상 속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담담히 수용한다. 그들이 머물던 시간과 우리가 서 있는 시간이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믿음. "그들이 그곳에 계속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끝나지 않을 연대를 믿는 일이다.
“말하라. 백번, 천번을 말해도 우리는 들을 것이다. 우리는 듣고 이해할 것이다.”
소설 속의 말처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이해하며 잠시 쉬어가는 것. 나에게는 그 '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나 역시 나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