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존재 미학을 새롭게 할 때
우리나라만큼 근대화, 현대화를 압축적으로 진행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의 신체는 매우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 전근대성과 근대성, 그리고 탈근대적성이 골고루 배여 있어 매우 기이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세대마다 그 층위가 배합되는 비율은 조금씩은 다를 것이다. 노년층은 농경적 신체, 장년층은 산업적 신체, 젊은 층은 정보적 신체가 우세할 것이다.
이러한 신체적 특성은 고통을 수반한다.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서로 반목하고 학대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우리의 신체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구성원의 세대별 구성도 그러하고 교육내용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학교는 고통스러운 장(場)이다. 많은 학교에서 아직도 경쟁교육이 성행하고, 성적순에 따라 한 줄로 세우는 일이 시행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있어 학교가 얼마나 고통일까 생각하면 정말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아직도 근대적 사고에 머물고 있는 우리 부모들은 이것이 자식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는 착각 속에 아이들을 공부 전쟁 속에 몰아넣는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학생들의 공부시간은 세계 최고였고 수면시간은 고등학생으로 올라갈수록 하루 6시간도 채 자지 못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수면센터가 고등학교 1, 2학년 학생 691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학생들의 평일 평균 수면시간은 5시간 24분으로 조사됐다.)
기계적 경쟁에 익숙한 아이들은 절대로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결국 이런 기계적 아이들은 미래에 도태될 것이 뻔하다. 미래는 창의력이 좌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진국의 교육 모토는 온통 창의력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신문에 '세계 1위'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고 한다. 일등에 대한 집착은 산업적 모드에서나 통하던 것이다. 등수를 매기려면 기준의 동일성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은 누가 적은 비용으로 가장 값싸게 수요를 만족시키느냐가 된다. 그래서 산업시대의 교육은 표준화되고 획일적인 것을 중요시 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경쟁은 아직 없는 수요를 누가 먼저 창출하느냐가 될 것이다. 어떤 목표를 충실하게 먼저 달성하거나 초과 달성하느냐가 아니라 블루오션을 누가 선점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목표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 자신의 꿈을 기획하는 '기획자'로서의 존재 미학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인간상이다.
과거의 습속은 정말 질긴 면이 있다. 최근에 경남 등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글로벌한 상식이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아직까지도 무모한 것으로 치부하니 말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변화에 가장 신속하게 반응해 왔고(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이 따랐지만) 그래서 가장 빠른 인터넷 문화를 만들었다.
문제는 우리의 신체를 더 이상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습속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한국인의 존재 미학을 미래지향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현실에 연연하지 말고 좀 더 미래적인 기획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