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적 감정의 가치

과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기

by 화니샘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을 읽으면서 회고적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노스텔지어를 경계하는 입장인데 반해 저자 중 한 명인 마사 누스바움은 회고적 감정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물론 공저자인 솔 레브모어는 마사와는 조금 생각이 다르지만 말이다. (그녀는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실버타운에 살고자 하는 ‘현재 지상주의자’들을 응원한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 특히 자신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고 이미 살아온 날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다.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거나 희망을 품는 것이 과거보다 덜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녀나 손자들을 위해 희망을 품기도 하고 걱정도 한다. 그렇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과거에 대한 만족감이나 회한, 죄책감, 분노 같은 회고적 감정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렇다면 이런 회고적 감정은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어차피 과거는 바꿀 수 없는데 기억을 살리는 것이 과연 유용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회고적 감정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뿐더러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당시 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과거를 거의 회상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가문을 자랑하거나 약속을 상기시킬 때 잠깐 언급하는 정도였다.


반면에 지금 사람들은 과거의 감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마사는 이런 변화에 영향을 끼친 세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고 말한다. 종교적 믿음, 정신분석학, 그리고 소설이다. (물론 연극과 영화도 한 몫 했다)

종교적 믿음은 우리에게 과거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늘 돌아보라고 가르친다. 이들 믿음에 있어 후회나 죄책감과 같은 회고적 감정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천당과 지옥과 같은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회고적 감정을 영원한 삶의 조건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은 과거의 자아가 현재와 미래의 자아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강화했다. 정신분석에 있어 과거, 특히 유년기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

더 넓은 범위에 걸쳐 더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친 요인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대를 살아간다. 그들이 삶은 늘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는 과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감정의 중요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설에서는 1인칭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많이 활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소설이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푸르스트는 우리의 과거가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될 것이라고 믿게 한다. 그는 우리가 지금 앞에 있는 사람보다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들, 즉 부모나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들에게 초점을 맞춘다고 보았다. 대부분 소설가도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의 과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고적 감정들이 매우 소중한 자료로 쓰이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회고적 감정이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인데 과거가 진짜 가치 있는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자신을 알기 위해 과거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대신 즐거운 일은 기억하고 슬픈 일은 빨리 잊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현명했던 것 같다.


우리 어머니도 그런 부류 중 한 분이시다. 지금 나이가 90세이지만 과거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으신다. 남편이 일찍 딴 세상으로 가셔서 홀로 사신지가 거의 50년 가까이 되셨는데도 남편 이야기는 그저 ‘좋은 분’이라는 한 마디 이외에는 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지금 다니시는 노인정 이야기나 자신이 돌보는 식물 이야기는 시시콜콜한 하나까지 빼놓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90년을 살아오시는 동안에 보통 사람이면 건너뛴 모진 일에서부터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셨다. 젊어서 남편이 죽고 어린 자녀들을 키우느라 설움 역시 말이 아니게 많았다. 그러나 되돌아봐야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지나간 날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면서 뭐하러 지나간 감정들을 회상하느냐고 하신다. 어머니에게는 그저 하루하루 견디며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사 누스바움은 회고적 감정이 매우 유용하고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먼저 과거의 행복한 감정 중 가장 중요한 회고적 기쁨을 예로 들면서 이는 자부심과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고 말한다. 물론 과거의 감정에는 슬픔과 회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슬픔은 애착의 증거가 되고, 애착의 대상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본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슬픔은 세월과 함께 무뎌지고 대신에 그 자리에 소중한 사랑의 흔적을 남겨놓는다.)


마사는 과거의 슬픔이 자기 삶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회한 또한 마찬가지다. 회한에서 강조되는 점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다. ‘내 아이가 그날 거기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부주의한 차에 치어 다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야’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슬픔과 마찬가지로 현재 시점의 책임과 관심사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죄책감 역시 회한과 마찬가지로 현재를 표현하는 역할을 하면서 그 표현을 통해 미래의 여러 가지 선택을 지시하기도 한다. 그런 나쁜 행동은 다시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뒤따르고 그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회고적 감정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내가 무엇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알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준다.

“내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자기 변화를 위한 매우 유용한 질문이다. 자신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회고적 감정은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유의미한 임무를 수행한다. 나아가 현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