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판별법
진실은 하나가 아니다. 진실에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경합하는 진실이 있을 때 어떤 진실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사람들은 진실을 선택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진실을 선택하고 불리한 진실은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 사진을 올릴 때 잘 나오지 않은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진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도 모른다.
복잡한 의제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주장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사실은 숨기거나 생략하기 마련이다. 편익을 강조하고 위험을 감춘다. 때로는 과장하기도 한다. 우리의 뇌는 사실보다 맥락이나 스토리에 끌린다. 맥락을 깔아 두거나 스토리를 만들면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진실을 교묘하게 편집하는 수법 중의 하나다. 우리가 가짜 뉴스라고 부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식으로 진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한 것들이다. 진실처럼 보이게 진실을 오도한 것들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쉽게 속는 이유는 내가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경향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일하기 싫어하고 특히 복잡한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 한다. 진실의 오도자들은 이런 우리의 게으름에 기생하면서 번식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발달할수록 경합하는 진실은 더 많아질 것이다. 지금도 정치권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서 진실공방은 거의 일상적이다. 경합하는 진실이 많아진다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진보는 진실들 간의 상호작용과 변증법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경합하는 진실은 창의성과 새로운 사고의 원천이 되기도 하다.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복수의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자들이다.
오도자가 될 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도 있다. 영국의 전 총리였던 토니 블래어가 “정치가들은 더 큰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때때로 진실의 전체를 숨기거나 곡해하고, 심지어 왜곡하기도 한다.”라고 시인했듯이 선의를 위해 진실을 오도할 때도 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윤리적 문제다. 진실을 오도하는 것이 정당화될 것인지 여부는 순전히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달렸다.
나는 지금 도덕적 판단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판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 실체적 진실을 오도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실을 오도하는 사람들은 크게 보면 두 가지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잘못된 현실 인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현실을 오도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공론의 장에서 추방해야 한다. 진실의 실체를 밝혀내는 노력을 통해 이들의 의도를 막을 필요가 있다.
또 한 부류는 자신이 진실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악의는 없을지 모르지만 의도치 않게 현실을 왜곡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착한 사람일 경우 피해자는 더 많이 늘어난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그들이 추진하는 일이 옳다 하더라도 왜곡된 현실 인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이들도 ‘가짜 뉴스’ 생산자들에 다름 아니다.
<만들어진 진실>이라는 책에서는 이들에 대해 “오해용 진실”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런데 이걸로는 좀 약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강력한 해시태그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