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철학자와 늑대>는 철학자이자 교수인 마크 롤랜즈가 ‘브레닌’이라는 늑대와 함께 한 이야기이다. 마크는 인간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무엇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자신을 규정한 모습을 믿는 동물이다. 인간만큼 잘 믿는 동물은 없다. 그러나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싫어하는 측면은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인간이 인간을 규정할 때 이러한 속성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브레닌은 혼자 놔두고 다니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에 함께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강의실 한쪽 구석에 있다가 강의가 지루하다 싶으면 길게 울었다. 대리 만족인지 학생들에게 브레닌은 정말로 인기가 좋았다. 브레닌은 제도교육에서 배우지 못했고 배울 수도 없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저자는 잊기 전에 그것을 기록해 두고자 이 책을 쓴다고 밝힌다.
우리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운을 다할 때 비로소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우리의 계략과 영민함과 운이 충만한 때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했을 때 버려진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우리 안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나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았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늑대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브레닌을 그토록 사랑했던 것은 그 녀석이 떠나 지금 그토록 그리움에 사무치는 이유는 바로 정규교육이 가르쳐주지 못한 내 고대의 영혼 속에 살아 있는 ‘늑대’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기억을 떠올릴 대 가장 분명한 것을 찾으려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치게 된다. 기억은 과거의 사건과 일화를 불러오는 의식적 경험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일화 기억은 신뢰성이 떨어지며 뇌 기능이 약화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기억이다. 진정 심오하고 중요한 기억은 우리 삶 속에 녹아있는 기억이다.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줄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성의 도덕적 실험은 힘없는 동물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선함은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인간의 사악함은 스스로 악의 가능성을 조작하는 데 있다. 다른 사람들을 약화하고, 이들에게 악을 행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늘 변명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나 늑대는 변명하지 않는다. 그저 할 일을 하고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인간만이 자신이 약하다는 이유로 부족한 도덕성을 변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리고 신념을 지켜낼 수도 없는 만큼 약해졌다.
인간만이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것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늑대보다 더 가치 있고 우월한가? 인간은 스스로에게 객관적이기 어렵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세 철학자들이 사용한 ‘영혼의 눈’으로 응시하면 우리는 저 우주의 무수한 별들 속 한 점에 불과한 존재이며, 더 나을 것도 없는, 자만이 별로 쓸모없는 그런 존재다.
우리가 그다지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동물,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다른 존재를 존경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레닌의 우아한 활주, 그리고 그가 다른 개와의 투쟁에서 보여 준 늑대로서의 존재,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 의지의 표명….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해 신을 찾을 때 나는 작은 늑대를 생각한다.
행복의 본질적 가치는 효용성을 따지지 않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행복을 하나의 감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즐거움이다. 행복은 즐거움이고 즐거움이 행복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동물은 감정을 쫓지 않는다. 인간만이 감정에 그토록 집착한다. 감정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결과 노이로제에 걸린다. 그래서 나온 새로운 해결책이 새로운 삶, 즉 특이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행복은 감정이 아니다. 삶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때론 불편함으로 인해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토끼를 잡는 과정을 관찰한 결과 브로닌은 인내심이 대단했다. 대부분 시간을 땅에 엎드려 근육을 긴장시켜 앞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한 채 앞발과 눈은 토끼를 향해 있다. 무려 15분 동안 그런 모습으로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사냥에는 성공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언제나 행복해 보였다.
나는 언제 행복했을까? 브레닌이 토끼를 사냥했다면 난 새로운 생각을 찾아다녔다. 그것은 그리 즐겁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은 즐거움만이 아니다. 행복 자체에는 불편함이 들어있다. 즐거움과 불편함이 하나가 되어야 완전한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순간을 통과해서 보기 때문에 순간을 놓친다. 우리는 개와 늑대와 다르게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간성은 인간존재의 핵심이다. 시간을 과거에서 미래로 뻗어 나가는 하나의 일직선으로 경험하는 시간 선에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단점 역시 크다. 우리가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며 바로 그 때문에 행복하기가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늑대는 매 순간을 그 자체의 보람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이 부분이 인간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인간에게 매 순간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매 순간의 의미는 다른 순간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내용 또한, 다른 순간들로부터 회복될 수 없는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시간의 피조물이지만 늑대는 순간의 피조물이다. 우리에게 순간은 투명하게 비친다. 순간이란 과거와 미래에 담보 잡혀 있을 뿐이다. 순간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들의 메아리이며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기대일 뿐이다.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는 과거이고, 일부는 미래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 삶의 대부분은 미래에 얽혀 살고 있거나 아니면 미래에 기대어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에 살고 있지 못함으로서 잃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오지도 않을 미래에 대해 고민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억된 미래나 욕망하는 미래를 현재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그럼으로서 순간의 피조물과는 달리 노이로제에 걸린다. 인간만이 경험하는 시간의 그늘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 자체를 보기보다는 순간을 통과해서 보는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이 의미 있기를 바라지만 그 의미가 어떻게 생기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성은 인간에게 이해 할 수도 없는 대상을 향한 욕망을 안겨 주었다. 우리는 삶에서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현재의 방식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의 특징인 계산하는 버릇, 속임수와 계략이 우리의 영혼 속에 너무 깊게 뿌리 박혀서 그렇다. 우리는 속임수나 계략으로 얻어 낸 성공에 수반하는 감정만을 쫓고 실패에 따르는 감정은 피하려고 한다. 한가지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또 다른 목표를 찾아 나선다.
우리가 항상 무엇을 쫓는 동안 행복은 우리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고 만다. 인간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은 순간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 끊임없이 유예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왜 그렇게 감정에 집착하는지 그건 우리가 빼앗긴 순간을 되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더 이상 실현 가능하지 않다. 시지프스의 신화의 공포는 그 과업이 힘들거나 그로 인해 한없이 불행해서가 아니다. 그건 오직 그 행위가 부질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때 공포는 사라진다. 돌을 올리는 목표가 있다 해도 목표를 달성했을 때 또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장류는 소유를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소유한 것을 가지고 그를 평가한다. 하지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다.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느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소유는 순간을 지워버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시간의 피조물이다. 순간은 소유하려고 해도 항상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순간에 충실하라는 피상적 설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만나는 특정한 몇몇 순간들, 그 순간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순간들이 인생 최고의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순간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준 것은 늑대였다. 희망이란 너무나 달콤하고 유혹적이지만 절대 신뢰할 수 없는 말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 난 희망 끝에 남겨진 내 자신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앗아간다. 끝까지 가져갈 수 없는 것은 최고의 순간에 실재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것만큼은 시간조차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법이다. 힘들고 차갑고 외로운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순간 그 순간이 우리를 가치 있게 한다. 인간이 시간을 초월하여 자연을 닮아가는 삶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그런 우리의 도전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