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그림자
겉과 속 5화 — 스며드는 그림자
Written by 유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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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밤 이후
그날 이후, 지연은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비, 피, 현우의 웃음, 그리고 민석이 쓰러지던 순간만
되풀이되었다.
민석의 병실에서 쏟아낸 피 냄새가
아직도 폐 안에 붙어 있는 듯했다.
나 때문이야…
지연의 마음은 계속 그 한 문장에서만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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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의 집
퇴원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민석은 다시 공장에 나왔지만
자주 흔들렸고, 숨도 짧아졌다.
지연은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죽을 챙겨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냥… 와봤어요.”
민석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지연 씨 오니까 좀… 숨 쉬어지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지연은 더 복잡해졌다.
고맙다는 말이 더 괴롭게 느껴졌다.
“따뜻하게 먹어요.
제가… 물 좀 가져올게요.”
지연은 그 말을 끝내자마자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숨을 고르지 않으면 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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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아래층 — 너무 조용한 공간
부엌 근처에서
낯선 여자와 마주했다.
정갈한 모습, 기름기 없이 말끔한 표정.
기온조차 차갑게 만드는 시선.
“너… 누구니?”
지연이 대답하려는 순간
“엄마, 잠깐만.”
그 뒤에서
익숙한 얼굴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지연의 폐가 조여들었다.
단발머리, 날카로운 눈매,
사람을 내려다볼 때만 짓던 그 표정.
윤주.
지연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그림자였다.
윤주는 전혀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오래된 장난감을 다시 발견한 듯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지연…?
아, 맞네. 느낌 왔어. 역시 너 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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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면 — 친근함 아래 숨은 칼날
지연은 한 발 물러섰지만
윤주는 다가왔다.
“와… 여기서 다시 보네?
세상이 참 좁다, 그치?”
혓바닥에 단내가 묻은 듯한 어투.
하지만 눈빛은
예전보다 더 차갑고 더 선명했다.
윤주는 지연의 어깨 앞을 스치듯 지나가며 말했다.
“소개할게.
이분이 민석오빠와 내 엄마
그러니까… 너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새엄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조용한 움직임조차 지연에겐 압박처럼 느껴졌다.
윤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지었다.
“근데… 민석 오빠랑 많이 친해졌나 보네?”
지연의 표정이 흔들렸다.
“오빠가 너 같은 여자 좋아할 줄 몰랐는데.”
농담처럼 들렸지만
지연의 가슴을 찌르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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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지우라는 요구
윤주는 더 가까이 다가와
지연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말했다.
“옛날 얘기…
그냥 서로 덮자. 알지?”
지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머리 속에서
찢어진 교복, 젖은 걸레,
윤주의 웃음소리가 번져갔다.
그러나 윤주는 태연했다.
미소는 그대로였다.
“우리 이제 가족이 될 수도 있는데
굳이 그런 얘기 꺼낼 필요 있나?
오빠가 알면… 어색하잖아.”
그 말은
지연의 몸속 어디 깊은 곳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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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의 내면에 스며드는 그림자
윤주와 새엄마가 부엌 쪽으로 돌아가자
지연은 벽에 손을 짚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과거가
계단 아래 어둠처럼 밀려왔다.
왜 여기 있어..
왜 민석씨 옆에…
왜 나한테…
지연은 다리를 떨며
겨우 민석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기 직전,
지연은 낯설고도 강렬한 예감에 잠시 멈췄다.
이 집 안에는
지연을 무너뜨릴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곧 민석에게도 닿을 것 같은
끔찍한 냄새가 공기 중에서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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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악연은 갑자기 스며들고,
우연은 예고 없이 우리의 삶을 찢어놓는다.
지연에게 닿은 이 우연은
서늘하고 조용한 그림자처럼
그녀의 삶을 다시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그림자는 이미
모두의 발목을 조용히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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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은 매주 화,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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