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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Nov 02. 2015

엄마의 시간

세월의 한 뼘이 존재하지만 나는 엄마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싶다.

우리 엄마는 가끔 그런 질문을 한다.

 엄마 몇 살로 보여?


엄마는 나이대보다 어려 보이는 게 사실이니 엄마 나이보다 젊은 나이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나는 가끔 엄마 친구분들이나 엄마와 나이대가 비슷하신 분들을 보고 엄마를 보며 '비슷한 나이대인데 엄마가 제일 예쁜 거  같아.'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즐거운 표정으로 되묻는다. '정말? 엄마가 제일 예쁜 거 같아? ' 하면서.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문득 엄마도 여자구나, 우리 엄마도 여전히 소녀 같구나. 하고 느낀다. 정말로 엄마는 나이대에 비하여 동년배의 친구분들보다 훨씬, 그리고 그 이하의 엄마 또래보다도 젊어 보인다. 그럴 때면 나는  당연하지!라고 말하는데 엄마는 꼭  세네 번씩 되묻곤 한다.  나중엔 같은 대답에 지쳐서 "그래!" 라며 무심하게 대답하지만 정말로 우리 엄마는 여전히 우아하고 예쁘다.


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세시기 중 일부/ 엄마와 아기



엄마의 시간은 내가 자라는 동안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는 걸 나는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내가 자랄수록 부모님도 세월에 한 발짝 더 다가가고 조부모님도 세월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고 있음을. 삶은 결국 만남과 이별의 장임을 나는 독립할 때가 다가오는 20대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우리의 간격은 여전히 넓다. 내가 엄마의 30대가 되면 엄마는 엄마의 엄마(외할머니)의 60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엄마의 그때와 같은데 엄마는 여전히 저 멀리, 나를 앞서가고 있다는 게 서글퍼졌다. 가끔은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묘한 감정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엄마의 풋풋한 10대의 삶을, 사회에 열심히 적응하던 20대의 삶을, 엄마의 모든 것인 나와 동생을 키우던 30대의 삶을 얘기로만 들었다. 나를 낳으신 뒤  첫아이를 위해 바친 엄마의 모든 것이 30대에 집중되어 있음에도  나는 엄마의 반짝이는 30대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내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나는 알게 모르게 남동생과 경쟁 의식을 가지며 살아왔다. 동생은 남자였고 나는 여자였으니까. 몰론 남녀 차별하는 환경이 아니었지만 유년시절 은연중에 내 머릿속엔 -

쟤가 나보다 엄마의 사랑을 더 받는 것 같아. 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었다. 우리 둘은 차별 없이 누구에게든 공평한 사랑을 받아왔고 지금도 마찬가 지니까. 나는 장녀라는 책임감을 책가방처럼 늘 지고 다녀서 동생보다 잘하면 잘했지 못한 건  없었기에 동생보단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동생보다 2년 먼저 태어났으니 2년치의 사랑을 더 듬뿍 받아왔을 테고 말이다. 어쨌든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괜히 "엄마는 나  사랑해?"라고 물었고 엄마는 첫 아이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라며 내가 그런 질문을 하며 애정도를 확인하는 것에 대해 서운함을 내비치곤 했다. 모유도 평균 아기들보다 오래 먹어서 오죽하면 동생은 모유보다 분유를 더 많이 먹었어야 했단다. 유치원을 가기 싫다고 도망쳐서 나중에 보내겠다며 유치원을 억지로 보내지도 않았고 콩이 싫다고 안 먹으면 나중에 커서 먹으렴, 하고 억지로 먹인 적도 없었다. 그냥 엄마는 내가 엄마의 전부라는 이유만으로 나와 동생을 애지중지 키워왔다. 엄마는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주었다고 자부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열했고 그때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맞다, 엄마는 역시 날 사랑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보내왔다. 엄마는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하나뿐인 딸이 된다. 밑으로 외삼촌이 둘 더 계시지만 어쨌든 그곳에 가면 엄마도 딸이 된다. 엄마가 엄마가 아닌 딸로서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신기하기도 하다. 엄마가 어려진 느낌이다. 엄마에게도 딸로서 지낼 곳이, 엄마의 엄마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게 다행인 것 같다. 나는 엄마의 딸로 태어났기에 엄마를 위로해줄 순 있지만 엄마보다 어려서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엔 부족하다. 내가 엄마를 믿고 엄마의 말에 안심하며 걱정을 놓아버리듯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외할머니의 딸이니까.


영화 친정엄마(2010) 스틸컷


 엄마는 그림을 잘 그렸고 십자수를 잘 놓았으며 피자, 빵 등 맛있는 반찬을 많이 해주었고 초등학생 때면 늘 바쁜 시간을 쪼개 학교에 얼굴을 자주 비추곤 했다. 반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쏘기도 했으며 바쁜 엄마들과 달리 소풍 때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새벽마다 도시락을 싸주곤 했다. 그런 엄마 덕분에 나는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가 되었다.  

 20대 때 농협 직원이었다던 엄마는 결혼 후 육아를 위해 퇴직했고 온종일 나를 키우고, 동생을 키우며 서른 즈음부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보내왔다. 사람들은 엄마를 엄마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할머니는 엄마를 내 이름으로 부르거나 내 이름을 넣고  @@어미야-라고 부르셨고 나와 관련된 사람들도 내 이름을 넣어 @@엄마,  @@어머니라고 불렀다. 몰론 엄마의 친구들이나 외할머니는 엄마 이름을 온전히 불렀지만 엄마는 내 엄마가 된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보다 내 이름으로 불린 적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마트에서 캐셔로 일하시는 지금이 좋다. 엄마의 이름을 불러주며  @@님 이라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직장. 엄마는 그곳에서 누군가의 아내도 엄마도 아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불리며 지금의 20대가 영원하지 않음을. 30대가 되고 언젠간 나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보내게 될 것 알게 되며 조금은 두려웠다. 나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살아야 하면 오롯한 내 청춘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30대를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보내왔고 행복했었다고 말한다. 특히 나와 동생이 한창 말을 배우며 커가던 그 무렵이, 조금 더 자라서 엄마와 대화하며 까르르 웃던 시절이 행복했다고.  그리고 지금은 다 큰 딸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구경도 하고 데이트를 하며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때 힘든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엄마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선 엄마가 가장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를 믿기로 했다. 나도 한 뼘 더 자라서 엄마가 되는 그때쯤에도 엄마처럼 계속 행복할 거라고.



 나는 좋은 딸일까?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와 하루가 멀다 하고 목청 높여 싸우던 그때엔 엄마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줄은 모르고 내 분을 삭이기 위해 쏘아대기만 했었다. 지금은 조금만 싸워도 금방 후회하고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전히 엄마와 싸울 때면 나는 없는 말도 만들어 쏘아대고 바로 1초도 안돼서 후회한다.  아직 남은 시간이 많지만 후회는 늘 따라오고 순식간에 바스러져버린다.  엄마에게 물으니 '그럼 좋은  딸이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행이다. 다혈질처럼 제 멋대로 인 성격으로 엄마와 싸우고 말썽 피우고 얄밉게 굴었음에도 엄마에게 나는 좋은 딸이구나.




나는 엄마의 자부심이며 엄마의 삶이자 엄마의  딸이다. 엄마의 푸르던 10대와 20대를 모르지만 30대가 되면 엄마의 반짝이던 30대를 닮게 될 것 같다. 여전히 엄마와 나 사이엔 세월의 한 뼘이 존재하지만 나는 엄마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싶다. 엄마처럼 살고 싶다.


"잊지 말자. 나는 엄마의 자부심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식이 아니다.

"드라마 미생(2015)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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