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 Nov 21. 2015

쉼표, 하나

마음의 쉼표가 필요한 순간

지금, 나한테 쉼표가 필요해

언젠가 내게 쉼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몸이 열개라도 부족하다는 듯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바쁘게 산다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바쁜 것도 '바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쉼표가 필요했다.


오늘 해야 할 일, 내일 해야 할 일, 일주일 뒤에 해야 할 일, 한 달 뒤에 해야 할 일. 할 일이 참 많다. 그게 사적인 영역이든 공적인 영역이든 해야 할 일이 늘 발생한다. 그러면 마음이 바빠진다. 마감 시간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A는 오늘 6시 안에 해야 하고 B는 내일 모레까지 해야 하고 C는 다음 주까지 여유가 있으니 며칠은 여유가 있네.' 같은 이런 계산을 매일 하며 살고 있다.




한때 친구들은 바탕 화면이 지저분하다며 내 핸드폰을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곤 했다. 화면 좀 깔끔하게 할 수 없냐고. 자주 사용하는 아이콘을 모조리 밖으로 꺼내놓은데다가 메모 위젯도   두세 개씩 사용해서 어떤 화면엔 온통 글만 가득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위젯 메모장이 공백인 날은 없었다.

과제들, 개인적인 일, 갑자기 생각난 아이디어, 중요해서 잊으면 안 되는 약속 등 뭐가 많았다. 핸드폰을 하루 종일 갖고 다니니 화면을 볼  때마다 해야 할 일을 상기할 수 있었다.  했던 일은 지우고 새로운 일은 다시 추가하고...  그러면서 늘 머릿속으론 오늘은 A를 해야 하고 내일은 B와 C를 해야 하고 파도처럼 쉼 없이 몰아치는 할 일에 대해 계획을 세우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쉼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바쁘니까. 


몸 말고 머리도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과자를 먹으며 놀고 있는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마감하면 또  그다음 할 일이 다가온다. 이미 완료된 일 대신 새로운 할 일은 계속 생겨나고...

할 수만 있다면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가위로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



특히 쉼표가 가장 간절한 때는 멘탈이 무너지려는 순간.

나는 꽤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 그걸 안 뒤로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지만 기쁘면 살랑이는 바람 한 올에도 둥실 떠오르는 풍선처럼 들떴고 슬프면 끝없는 우울함과 무기력함으로 밑바닥까지 가라앉곤 했다. 특히나 우울하고 감상적인 면이 강했기에 힘들다, 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나보다 힘든 사람들도 많다는 걸 잘 알지만  '나'의 삶에선 주인공인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다. 모든 순간들이 오로지 나만의 경험이고 나만의 인생이니까.

말에 치이고, 행동에 치이고, 상황에 치이고, 혼자 받는 과민한 스트레스에 치이면서 정신적으로 힘이 드는 상황 요컨대, 스스로의 한계점을 인식할 때면 미칠 것 같은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나는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고 깊은 어둠 속에 잠식당하는 그런 기분을 느낄  때마다 속으로 '큰일 났다'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 생각하기 이전에 항상 그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입술을 열고 큰일 났다!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스물세 살의 나로 자라는 동안 속으로는 수백번도 더 '큰일 났다'고 외치곤 했다. 몰론 지나고 나면 당시 느꼈던 감정의 백분의 일도 안 되는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지만. 어쨌든 그럴 때마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아, 나 큰일 났구나!  


그리고 그럴 때마다 쉼표를 갈구했다.

쉼표에 대한 갈증은 목마름으로 인한 갈증보다 조급했고 간절했으며 때론 서투르게 표현됐다.  

'너무 힘들어. 그냥 혼자서 캐리어 하나 끌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

갈증은 일종의 현실 도피로 폭발하곤 했다. 여행 = 현실도피라는 공식이 일반화된 사실이 아니지만 내게 있어서의 현실도피는 여행이었다. 여행을 가면 그 순간 만큼은 아무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몰론 여행이 끝나갈 무렵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나 마음이 두 배로 무거워지긴 했지만.



인생에도 쉼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문장에는 쉼표가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일종의 준비자세.  쉼표의 <언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너무 길고 지루해서 여기에 적지 않겠다. 정확한 의미를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언제, 어디서 쉼표를 찍어야  할지 알고 있으니까.


<음악>에서의 쉼표의 역할은 악보에서 쉼을 나타내는  기호라고 한다. 피아노를 배운지가 꽤 오래전이라 가물가물 하지만 쉼표가 들어간 곳에선 잠시 바쁘게 움직이던 건반에서 손을 떼곤 한숨을 돌리며  악보의 다음 음계들을 읽어나가곤 했었다.

,

그 쉼표 하나가 간절한 순간


그런 쉼표가 내게도 하나 있었으면.  

버석거리는 모래를 맨발로 느끼며 푸른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찰방이던 여유로운 한 때 같은,




작가의 이전글 저는 꿈을 먹고 살겠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