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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Mar 17. 2023

퇴사를 하고 느끼는 소회

림의 나날은 지극히 평범했다.

매일 아침 7시에 울리는 알람소리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 기계적으로 화장실에 가 졸린 눈에 찬물을 끼얹어 눈을 뜨고 나면 금세 출근할 시간이 되어있었다.

적당히 골라둔 옷을 입고 365일 중 350일은 들고 다니는 데일리백을 맨 채 로퍼를 신고 나면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갈 타이밍이었으니까.

버스에 몸을 싣고 30분. 그러고 나면 회사 앞 정류장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내려 각자 다른 회사로 걸음을 옮겼고 그 틈에 림도 가방에서 사원증을 찾아 목에 매고는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가서 컴퓨터를 켜고 탕비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타 마시면 업무 시작하기 딱 좋은 시간대. 부지런히 발을 놀려 출근한 회사엔 먼저 도착한 발 빠른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밀린 업무를 먼저 처리한다고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자리에 자켓을 걸치고, 컴퓨터의 전원을 켜둔 채 탕비실에서 텀블러에 아메리카노를 타는 동안 그 사이 출근한 다른 동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걸었다. 오전 9시 오후 6시. 종일 키보드를 두들기는 직업이었다. 적당히 키보드를 두들기며 업무를 하다가, 전화도 받고, 상사들의 지시에 따른 업무도 처리하고. 칼 같은 퇴근시간에 제때 퇴근하는 날도 있었고, 동료들과 남아서 야근식대로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으며 남은 잔업을 하는 날들도 있었다. 무수한 날들이 지나 어느새 림에겐 퇴사의 날이 다가왔다.


8년간 몸담았던 직장이었다. 림보다 먼저 입사했던 많은 이들이 대부분 그녀보다 먼저 이 회사를 나갔다. 림보다 늦게 들어왔던 이들 중에도 먼저 회사를 나간 이들이 많았다. 그만큼 오래 다녔던 곳이었다. 언젠가는 관둬야 했지만 지금이 적기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적당히 고생스러웠고 적당히 일 잘하는 직원의 위치에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습관처럼 마셨던 아메리카노를 마지막으로 마시며 인수인계까지 끝낸 그녀는 퇴사 후 세워둔 여행계획의 일정을 짜느라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들겼다. 덕분에 노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퇴사를 하는, 사실상 휴직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결혼을 했고 아기가 생겼다. 배부른 채로 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내린 빠른 판단이었다. 휴직을 하고, 복귀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 어차피 남편은 타지 사람이라 주말부부도 청산해야 했었기에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남편만 따라 연고지가 없는 곳으로 올라온 림의 나날은 여전히 평범했다.

매일 아침 7시에 울리는 알람소리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 남편이 출근준비를 하는 동안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에 먹을 간단한 먹거리를 챙겼다. 삶은 계란, 사과 몇 조각, 빵 이런 게 전부였지만 가만히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건 부부간의 의리가 아닌 것 같아 자발적으로 하게 된 행동이었다. 포옹을 하고 남편을 보낸 뒤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잠을 만끽해도 림에겐 여유로운 하루가 남아있었다.

적당히 골라둔 옷을 입을 필요도 없었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추운 아침바람을 이기며 나가야 할 일도 없었기에 그녀의 체력은 조금 약해졌지만 그것대로 좋았다. 동료들이 컴퓨터를 켜고 아메리카노를 한 잔 타서 키보드를 두들길 시간에 림은 오늘 저녁거리를 뭘 먹어야 할지, 오늘 집안일은 어떤 것을 할지, 여가시간에는 책을 볼지 유튜브 클립을 보며 시간을 때울지 등을 고민했다. 아메리카노를 찾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집에만 있으니 굳이 카페에 갈 이유도 없었고, 종일 키보드 두들기며 일하는 게 아니니 책상 앞에 앉아만 있을 일도 아니었고 진득하니 앉아있질 않으니 오래 두고 마실 커피가 필요하지 않았다.


문득 한낮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날. 그런 날엔 동네의 예쁜 카페를 골라 화장기를 조금 있게 생기 있어진 얼굴로 에어팟을 꽂고 밖으로 나갔다. 점심시간에 제일 부러웠던 사람이 1시가 다되도록 사무실로 복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었는데 지금 그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은 헛헛했다. 챗바퀴 같던 일상에서 내려왔는데 일상의 무료함은 참기 쉽지 않았으니까. 무엇을 해야 할까.

림은 매일을 고민했다. 뱃속의 아기를 키우기 위해 앞으로는 바빠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주어진 시간은 그녀만을 위해 온전히 쓸 수 있었으니까.


그저 지금을 즐기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면 여태 가지고 있던 소속감이 사라졌음에 무료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싶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정해진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하고, 남은 여가시간을 소중히 보내며 짧게 저무는 하루에 아쉬워하던 삶. 지금은 그와 반대로 그저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되는 무한한 시간이 남아있는데, 나는 왜.


뭔가 아쉽고 새로운 걸 해야 할 것 같은데 시도하기엔 겁이 나는 건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팝송을 들으며 림은 오랜만에 시킨 아메리카노 한 잔을 여유롭게 홀짝였다. 1시가 가까워지고 자리에 있던 몇몇 이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림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여유를 누리는 지금이야말로 나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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