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열린 연극 속 남자와 여자는 번호를 교환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마음이 붕 떠서 일이 잘 안 됐다. 내가 자주 가는 동네 카페에 가서 조금이라도 집중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카페에는 보통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오전에 일하러 갔었는데 오늘처럼 오후에 일하러 가보기는 처음이었다. 가는 길에 오후에는 카페 손님이 많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면 조용히 일하기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막상 가보니 이 카페는 오후에도 일하기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페 문을 열자 젊은 여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아이스라테를 시켜놓고 폰을 가로로 들고 있었다. 유튜브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까? 혼자 와서 시간을 죽이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아아를 시켰다. 제일 넓은 테이블에 거의 나의 지정석과 다름없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한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남자는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여자가 굳이 바꿔주겠다고 했다. 남자는 노트북을 들고 들어왔다. 아, 노트북을 사용하기 더 좋은 테이블을 남자에게 양보하려고 한 것이다. 자신은 어차피 유튜브나 볼 거라서 테이블이 낮은 자리에 앉아도 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이 카페를 방문하는 모든 손님들이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작은 선행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저 여자분도 나처럼 이 카페 사장님을 응원하는 단골이구나!’ 싶어 내적 반가움으로 마음이 동했다. 나도 사실 이 카페에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는 이유가 이상하게 이 카페 사장님(왠지 이름이 케빈일 것 같다. 케빈이라고 부르겠다. 한국 이름은 왠지 연우, 현우 뭐 이런 상당히 말랑말랑한 느낌의 이름일 것 같다. 연우와 현우라는 이름이 말랑말랑하다는 것은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이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쓰도록 하겠다.
아무튼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나는 카페에서 누군가가 다른 손님에게 자리를 먼저 양보하는 것은 처음 봤다. 카페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앉을자리를 고를 수 있는 것은 먼저 온 사람만의 특권이다. 그런데 자기가 들어온 다음에 들어온 손님이 이 카페에서 편안하게 볼일을 보고 갈 수 있도록 최적의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카페 자리 앉기 규칙에 어긋난다. 카페 자리 앉기 규칙은 뮤지컬 티켓 판매 규칙과 같은데, 시야가 좋은 자리는 선착순으로 팔리기 마련이다. 이 여자의 행동은 내 뒤에 앉은 사람이 나보다 키가 작은 것 같아서 내가 구매한 앞자리 티켓을 자발적으로 양보하는 격이다. 아무도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First come, first served.’ 정신에 위배되는 이런 행동은 오늘날 서울에서 목격하기 쉽지 않은 진귀한 모습이다.
그런데 아뿔싸. 그녀의 아이스라테는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서 박살이 났다. 급하게 물건을 옮기느라 쟁반을 한 손으로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위에 놓여있던 묵직한 아이스라테가 그만 중심을 잃고 수직낙하한 것이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아이스라테는 순식간에 의자 위에 놓여있던 그녀의 가방을 적시고 중력의 법칙으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거대한 베이지색 웅덩이를 이루었다. 굵은 얼음 조각들이 유리 조각들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뭐가 얼음이고 뭐가 유리 조각인지 분간이 잘 안됐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마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치코리타(풀타입 포켓몬. 상당히 케빈스러운 소품이다.)마저도 분명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여자는 거의 울 것 같았다. 남자는 어쩔 줄 몰라했다. 케빈도 당황했지만 그래도 신속하게 쓰레받기를 들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열심히 아이스라테의 흔적을 지웠다.
순간 나도 어쩔 줄 몰랐다. 여자만큼은 아니어도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나도 일어서야 하나. 뭐라도 도와야 하나. 좌불안석이었다. 근데 그냥 없는 척하기로 빠르게 결정했다. 이미 여자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거다. 남자가 사양했는데도 굳이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모두가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일단 나까지 일어나서 뭔가 액션을 하기엔 너무 공간이 좁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액션이랄 게 깜짝 놀란 표정을 한 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어머, 괜찮으세요?’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다음 액션을 뭘 해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그걸 티슈로 닦을 것도 아니고 걸레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나까지 가서 도와줘야 할 정도로 큰 웅덩이는 아니었다. 나는 그냥 손님 1이었다. 나는 투명인간 역할을 맡는 쪽을 택했다. 단골 카페에서 갑작스레 열린 연극(?)에서 내가 맡은 투명인간도 상당히 어려운 역할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노트북에 고개를 고정시켰지만 계속 눈길이 사건 현장으로 스리슬쩍 옮겨갔다. 힐쭉힐쭉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입술을 쏙 오므렸다가 하는 등 얼굴 근육이 지마음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혼났다. 노트북 화면 속 글씨는 여자의 가방과 의자 다리를 타고 떨어지는 아이스라테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10분 정도 지났을까. 여자가 자리를 옮기고, 아이스라테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지고, 남자는 원래 여자가 앉아있던 자리에 노트북을 펼치고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케빈이 커피와 빵을 남자에게 서빙했다. 그리고 또 3분쯤 지났을까. 케빈은 여자에게 아이스라테를 새로 갖다주었다. 여자는 손사래를 치며 유리잔도 배상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괜찮다고 죄송하다고 거듭 거절했는데, 아 이거 이미 남자분께서 결제해서 드리는 거라고 했다. 헉! 만약 나였다면 난 진짜 땅으로 꺼지고 싶었을 거 같다. 안타깝게도 카페의 크기는 약 8평도 안되었다. 남자는 고무고무 열매를 먹고 팔이 고작 두 배만 길어져도 그녀의 테이블에 손이 바로 닿을 거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팔이 세배가 길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었고. 여자는 카페 공간이 더 넓은 곳이었다면 아예 아무도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했겠지. 여자의 얼굴은 더 욹그락붉그락해졌다. 여자는 괜찮다고 했지만 남자도 괜찮다고, 자리 양보해 주신 게 감사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결국 여자는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하고 아이스라테를 케빈에게서 건네받았다. 그리고 10분 뒤에 여자는 아이스라테를 케이크아웃 잔에 담아서 나갔다. 남자도 일을 다 봤는지 20분 정도 뒤에 짐을 싸서 나갔다. 설마 했던 남자와 여자의 번호 교환은 없었다.
손끝과 발끝이 나도 모르게 저릿저릿한 희귀한 광경이었다. 아아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오늘 목표했던 업무를 마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정말 집중이 되지 않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