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만 Sep 25. 2023

탱고와의 동행

매력 없다고?

 탱고는 20년 전 댄스선생님을 생각나게 한다. 동갑내기 부부의 권유로 동네 주민센터에서 댄스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고교 때 야외전축을 틀고 일명 개다리춤을 따라 해 보면서 몸치로 여겼다. 소울(soul) 춤이라고 불렀고 판타롱 나팔바지가 유행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어도 보지만 어색해서 곡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다. 잘 추는 사람을 흉내 내려니 한 박자씩 늦고, 분위기에 맞춰 즐거운 듯 미소를 띠어야 하니 진땀 나는 일이었다.

 무용을 전공한 댄스강사는 검은색 무용복으로도 멋있고 리드미컬한 룸바 동작은 관능적이기도 했다. '오드리 될뻔'이라고 별명을 붙일 만큼 매력 있었다. 자세교정을 위해 잠깐씩 예쁜 선생님이 잡아주면 숨이 막힐 정도였다. 룸바에서는 한쪽 발에만 무게를 얹는 골반의 세틀(settle) 과정이 기본동작이다. 룸바음악에 맞춰 파트너 없이  전진과 회전만으로도 룸바맛이 난다. 선생님의 동영상만 따라 해도 혼자서 추는 룸바춤이다.

 두어 달 때쯤 왈츠와 룸바를 익히면서 탱고도 레슨과목이 되었다. 탱고웍(Tango Walk)은 왈츠보다 빠른 템포에 동작도 쉽지 않았다. 걷기부터 배워가는데 탱고음악은 군대 제식훈련 같은 스타카토이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씩씩해지고 돌진하는 기분에 젖는다. 지나치게 씩씩해지면 여성파트너를 잡아당기거나 밀어 제친다. 초보자는 자기가 당긴 지 밀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내 보고 틀렸다고 우겨대는 일도 선생님눈에 다 들어왔을 터였다. 그러고도 잘 춘 것처럼 의기양양한 꼴을 보다 못했을까? 결국 내 자세를 교정하던 선생님이 홀딩을 풀고 자리에 가 앉아버리고는 잠시 쉰다고 했다. 누가보아도 나 때문이었다. 석 달만에 내가 댄스수업에 안 나오는 게 낫다고 여겨지는 분위기 아니었을까.

 춤은 남자가 리드해야 한다는 데 자존심이 상했다. 댄스학원을 혼자 이리저리 찾아 문을 두드렸다. 체육과출신인 부부가 교습 중인 학원을 찾아갔는데 대체로 젊은 분위기였다. 무도회에서 체인징파트너를 하더라도 무리 없을 내추럴 댄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본 베이식으로도 정확한 리드를 가르치는 게 학원의 자부심이었다. 교습비와 레슨시간표등을 상담 중에 학원장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냥 주민센터에서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교습비 차이는 몇 배 컸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당신은 따지는 게 많아 매력이 없는 것 같으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키는 작고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 속성으로 배워보겠다는 나의 속마음을 이미 꿰뚫어 보는 듯했다. 매너마저 없고 젊은 여성에게 기피대상이면 학원입장에서는 위험부담이 크다. 물이 좋으냐의 문제이다. 아내와 함께 배울 거라고 하며 어렵게 등록하였는데 화려한 댄스피겨는 가르쳐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막대기로 꿴 축이 부드럽게 돌아야 한다. 돌이켜보니 회전을 위해 박스 스텝을 지루하게 연습시켰던 것 같다. 360도 회전 중에서도 신체 어느 한 곳이 찌그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시선까지 정렬된 느낌이 쉽지 않다. 발목에 힘이 있어야 감속도 가능하다. 매너와 기본기를 위주로 훈련을 했고 체중의 이동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다른 학원의 댄스마니아들이 보기에는 그저 걷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댄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한국사회에 팽배한 터라 부끄러운 생각으로 자괴감에 빠질 때도 많았다.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댄스와 파티로 정신 못 차리며 사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시범공연을 준비하다 보면 배워야 하는 루틴과 비용도 많이 들어 그만두려는 때도 많았다. 댄스를 좋아하는 아내 때문에 차마 그만두지 못하는 남편들도 없지 않다. 같은 취미로 다투면서도 함께하는 커플댄스는 지난(至難)한 과정이기도 하다. 1년쯤 되었을 때 동료들을 따라 국내 최고로 여기던 부부댄스클럽에도 가입하였다. 년 4회의 정기댄스로 파티에도 익숙해지고 등 떠밀려 탱고를 시범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십여 년 후 다시 보니 열정도 기량도 퇴보했지만 열심이었던 흔적이 자랑스러운 영상으로 남았다. 

 코로나19로 3년여간 문 닫은 학원도 많았고 파티도 열리지 않았으므로 우리 클럽 멤버들도 탈회가 많아졌다. 모두들 회장직을 기피하는 때 차기 연도 클럽회장을 맡았다.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댄스에 대한 미지근한 생각들을 떨쳐내고 신규회원 확보와 클럽재건을 목표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지털명함에 탱고 동영상을 올리는 등 낯선 시도들을 하면서 홍보도 하고,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자세로 왈츠시연도 했다. 회장으로서 활력을 잃어서는 안 되겠기에 용감해지고 댄스에 대한 철학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댄스로 아이스브레이크를 겸한 외부 공연을 선보이니 신노년 커플의 표상처럼 여길 만큼 부러워하기도 한다. 댄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세월 따라 변했다. 탱고를 배우며 자존심이 상했던 댄스와의 동행이 우리 부부의 건강과 심리적 연대감에 끼친 영향이 컸다. 자부심을 느낄 만큼 관록도 붙어있어 신노년의 방향타 같은 모습도 보여줄 수 있어 기뻤다.  

 K 회장이 주관하는 조찬포럼에서 왈츠 제안도 다. 아침부터 왈츠를 추는 것이 낯설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꺼이 응했다. 연말이라 저녁모임을 할 수도 있다고 하니 형편대로 하면 된다. 재능기부 공연까지 하면서 자부심도 느끼는 노년을 살고 있는 듯하다. 시니어로 춤을 추겠다고 나댈 일은 아니지만, 시낭송대회에서도 심사위원들이 심사할 동안 댄스공연을 하면 좋겠다는 제안은 그럴법했다. 재능기부를 흔쾌하게 해 주고 최선을 다하면 더 큰 감동이다. 누군가의 행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기뻤다. 목표가 선명해 연습을 열심히 하는 계기도 되었다.  똑똑해진 AI로 바쁘게 돌아가는 세태에 춤으로 쉼표를 제시할 수 있어 행복하다.


탱고 동영상

https://youtu.be/1SbPvfqDHIw


작가의 이전글 Elephants & Lif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