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 아이언을 집어 든 날

by 이용만

몸의 컨디션이 특별히 좋아졌을까? 그렇기도 하지만 마음이 진취적으로 변한 때문이다. 최근 만나는 사람도 부쩍 늘고 해야 할 일들로 들떠있다. 골프대회가 있는 날이다. 아마 경로우대증을 받은 뒤부터 왠지 자신 없어하던 롱 아이언을 다시 골프 백에 담았다. 3번 4번 5번 아이언처럼 번호가 낮을수록 골프채는 길다. 통칭하여 롱 아이언이라 부르며 프로들도 다루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루기 쉬운 우드나 유틸리티라고 부르는 골프채로 4,5번 아이언을 대체하여 사용하는 추세다. 뭉툭하게 생긴 골프채 헤드는 골프공이 굴러가는 거리도 늘게 되어있다. 반면에 아이언만큼 정확하게 그린에 올릴 확률은 적다.

대충 거리를 보내는 애매한 샷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우드나 유틸리티를 빼고 4번 아이언을 백에 넣었다. 정신을 집중해서 신중하고도 정교한 샷이 필요했다. 4번 아이언으로 내가 믿는 만큼 정확하게 쳐 보내야겠다는 왕년의 투지가 불끈 올라왔다. 잘 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생겼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서는 없던 집중력도 생기는 법이다.

코로나 상황도 거의 끝나가고 새로운 꿈을 키워가는 일에 신바람이 났다. 갑자기 활력이 넘치는 나를 사람들이 금세 알아차렸다. 내게 차기 댄스 클럽 회장을 불시에 맡긴 것이다. 핑계 댈 틈도 없이 총회 때 가결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책임감이 무겁게 자리할수록 생각도 많아졌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번은 맡아야 할 직책이었다.

파티가 없던 3년여 공백으로 그동안 익혔던 피겨와 루틴도 흐릿해지고 발목과 무릎 허리도 약해졌다. 회원들의 탈회와 휴회가 이어지니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나의 신규 사업 구상은 뒷전이 되었고 성공적인 파티를 위한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지난날 한국 사회에서는 빗나간 사교춤이 볼룸(Ballroom) 댄스의 좋은 점들을 묻히게 한 주범이다. 춤에 대한 인간의 본성과 철학을 설파하기까지 했다.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신나는 삶이란 댄스, 골프, 무슨 일이건 재미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죽을 때까지 견딜 힘도 될 수 있을 것임을 입증하고 싶었다.

일을 매개로 많은 사람들과 연락하게 되었다. 만나야 할 약속들이 많아지니 오히려 시간을 귀하게 쓰게 되었다. 남을 위한 일부터 찾고 그들의 협력을 구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남을 돕는 일부터 해야 비로소 나를 돕는 일이 됨을 실감했다. 남을 도우려 해도 스스로 먼저 신이 나야 제대로 도울 수 있다. 사람들을 만나보니 젊게 사는 사람도 많았다. 우선 나의 늙수그레한 모습부터 떨쳐내야 했다. 마음이 정해지니 행동도 달라졌다. 소모임과 행사에도 참여하고 반은 미친 듯 열정이 있어야 했다.

단체 행사에서는 골프를 치는 기회도 많다. 그나마 자신 있어하던 취미이니 이것부터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었다. 골프는 멘털 게임 이라고도 하지 않더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씩씩해진 마음 덕에 옛 전성기 때의 샷 감각을 찾았다. 자신감으로 퍼팅까지 쑥쑥 들어가 주니 동반자들도 감탄할 정도로 골프게임은 술술 풀렸다. 기준타수보다 한 타를 줄인 ‘버디’가 3개였고 74타 스코어를 기록했다. 가장 적은 타수를 기록한 메달리스트가 되는 데 손색이 없었다.

시상식 소감 발표에서도 ‘춤으로 골프도 좋아진다’며 댄스 홍보를 했는데 어색하지 않았다. 좋은 골프 스코어가 댄스 실력마저 좋을 것 같은 착시효과를 만들었으리라. 무용 무술에서 리듬과 부드러움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안다. 최근 수필가로 등단했다는 것도 은근슬쩍 끼워 넣었다. 차분한 ‘생각’도 하고 사는 인간임을 알리고 싶었다. 무엇이든 서로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으면 보람도 있다. 마음껏 홍보를 해대며 자신 있게 떠들 수 있었던 게 신기했다. 오늘 나의 4번 아이언 샷처럼 그들은 ‘의외의 나’를 한 동안 기억할 것이다. 4번 아이언을 들고나간 일은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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