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反轉)을 꿈꾸며
스위블(Swivel)은 완급(緩急)의 반전(反轉)이다. 댄스용어 스위블은 한쪽 발끝으로 여성의 무빙(Moving)이 180도 반전하는 동작이다. 탱고의 '오픈 프롬나드 링크'에서 여성의 스위블이 그렇다. 블루스의 지그재그 스위블도 파트너와 함께 우측으로 진행하던 여성을 스위블로 돌아 세우는 14 카운트의 연속동작이 화려하다. 부드러운 정(正) 진행 중에 일순간 역(逆) 방향으로 몸이 바뀌며 시선도 마주 본다. 긴장감을 더하고 역발상의 흥미를 돋우는 춤의 묘미가 아닐까?
발(足)만이 아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꿴 축의 이동이 계속되고 있어야 자연스러운 회전이 가능하다. 무게중심의 이동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이지만, 무빙을 강조하는 이유는 진행 중인 몸을 동작의 끝에서 낚아채듯 해야 팽팽한 텐션(Tention)으로 멋도 있고 중심을 잃지 않는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듯한 무의식의 흐름에서 유능한 남성의 리드로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데에 춤의 진수(眞髓)가 있다.
'여성은 루틴을 몰라도 된다'라는 농담 같은 말은 스위블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여성이 피겨의 다음 동작을 알고 한 템포 빠르게 스위블을 해버린다거나, 남성이 미덥지 않아 무게중심을 어정쩡하게 옮기면 발이 꼬이기도 한다. 한번 꼬인 불신(不信)은 기억된 학습이 되어 서로 긴가민가한다. 이윽고 말도 꼬이고 머릿속이 꼬이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된다. 파트너 탓이 늘면서 기량도 늘지 않으니 춤이 싫어지기도 한다. 춤이 어려운 이유이다. 자존심까지 상하면 '중대 결심'까지 하기도 하니 댄스스포츠가 어려운 이유이다. 부부댄스를 계속하고 있는 커플은 대단한 인내심의 소유자로 무조건 상을 줄 만하다.
댄스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남짓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무도회장 플로어에 서고 루틴대로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학원에서 처럼 익숙한 출발위치가 아닌 출입구 쪽에서 시작해야하는 게 불안했다. 기량이 떨어지는 골퍼는 제일 끝 순서로 티샷을 하는 것처럼 문간에 앉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록이 쌓여야 순리(順理)도 자리배치도 보인다. 머뭇거리는 우리 커플을 슉슉 지나치는 회원들 틈에서 첫 발을 뗄 수도 없었다. 머릿속이 얼음처럼 하얗게 되었다. 리셉션에서 홀짝홀짝 주고받은 와인 때문인지 어떤 피겨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춤 종목별 루틴을 포켓용 단어장에 깨알같이 적어오기도 했다. 기껏 식사 중에 한 번 꺼내보았을 뿐 음악이 계속 바뀌어 일일이 찾기도 어려웠다. 플로어에 올라서면 음악은 벌써 저만치 흘러갔고 파트너에게 들을 핀잔부터 떠오르니 속수무책이다.
댄스클럽의 이벤트인 골프투어에 참여했던 때의 이야기이다. 댄스화도 준비해 갔다. 초록의 잘 다듬어진 골프코스 첫 홀의 티잉 그라운드는 훌륭한 댄스플로어로 보였다. 댄스클럽이라 그런지 끼 있는 분들이 많다. 티샷을 하기 전 루틴인 듯 자이브(Jive) '스톱 앤 고(Stop & go)'를 익살맞게 시작하는 여유에 폭소를 터트렸다. 언제쯤에나 근엄한 표정이 아닌 미소로 춤을 출 수 있을는지 하면서도 춤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마세요. 우린 60세에 시작했어요" 또 다른 선배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서둘러 마스터하려는 내 심성을 알고 하는 말 같았다.
저녁 식사와 함께 춤을 출 만한 공간에 음악만 틀어주면 즉석 무도회이다. 댄스화도 준비해오지 않았던가. 남녀 골프 우승자에 대한 상(賞)으로 그들의 룸바 리딩(leading) 댄스로부터 파티가 열렸다. 아니, 그런데 카펫에서는 어떻게 춤을 춰야 하나? 궁하면 통한다던가. 테이블에 폭이 넓은 스카치테이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잘 미끄러지도록 구두 바닥에 붙이고 춤을 춘다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처음 댄스화를 신었을 때 밑창에 붙어있던 비닐을 떼어내는 일을 잊었다. 플로어 바닥이 원래 미끄러운가 보다 여겼다. 정신없이 춤추었던 황당한 추억이 떠올랐다. 이번엔 반대로 황당하게 해야 한다. 순발력과 재치가 무도장 분위기를 띄웠다.
양탄자 위에서 공간도 좁은 터에 빠른 동작의 '라틴 종목'이 좋은 선택이다. 카펫 위에서 추는 블루스와 탱고는 남성들을 조심스러운 신사로 만들었다. 몇 분은 신발 밑창에 테이프를 붙였으나 숙녀분들은 아예 맨발로 추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카펫 위에서 하이힐의 뒷굽으로 '스위블' 같은 회전 동작을 하면 카펫이 꼬이던가 자칫 엉덩방아를 찧을 일이다. 파라 클럽 숙녀분들 파이팅. 숙녀의 맨발은 용서되는 데다 섹시하기까지 하다. 신사의 맨발은 느낌이 달라도 엄청 다른 것은 왜일까? 신사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끝내 양말은 안 벗는다. 신사 체면에 어찌 훌러덩 양말마저 벗고 춤을 출 수 있겠냐 싶었다. 아니 맨발로 춤을 추는 숙녀분 발을 밟기라도 하면? 내 춤 솜씨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살다 보면 스위블(Swivel)처럼 꼬이는 일도 비일비재한 게 아니더냐. 댄스화 밑창에 비닐테이프를 붙여 양탄자가 발끝에서 돌돌 말리는 일이 없도록 했던 추억이 아스라하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골프 그린은 얼마나 환상적인 플로어인가. 멋지게 블루스의 지그재그 스위블을 하고 골프화 뒤축에 한 움큼 뽑혀 나온 잔디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면 그린키퍼(Green keeper)가 기절하지 않을까 싶다. 춤을 시작한 뒤로 상상도 못 한 일이 떠가는 구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