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덕에 천국에 가는 수도 있어
신부님의 장례
부활절 즈음 해외여행 중인 때였다. 딸이 서유석 사도요한 신부의 부고를 문자로 보내왔다. 수술하고 좋아졌다는 몇 년 전의 이야기가 생각났지만 뜻밖이었다. 서 신부와의 인연은 딸아이 결혼식 주례를 서면서 깊어졌다. 사돈댁에서도 서 신부를 잘 알고 있어 놀랍고 반가웠다. 양쪽 집안을 다 아는 신부님이 주례를 봐주셨으니 축복받은 혼사였다. 가끔 안부를 전하는 때에는 아이들 이야기를 꼭 하게 되었다. 지난 설날 미안한 마음에 과일을 보내며 수녀님들과 나눠 드시면 좋겠다고 통화할 때 신부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임종이 임박했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던지 다른 친구들도 모르고 있었다. 귀국하는 내내 서 신부와의 추억들이 떠오르며 퍼즐 맞추기처럼 합쳐졌다. 젊은 시절 어느 날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서 신부의 초대로 오류동 수녀원을 방문해서 모두들 술에 취했던 날이 떠올랐다. 수녀원에서 술을 마시다니? 성당 학생회 친구들인 우리에게도 불경스러운 듯했다. 수녀원이면 '금남(禁男)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알고 보니 수녀님들이 축하자리를 일부러 마련한 일이었다. 그날의 만남이 있기 전까지 내게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는 데 군종신부가 되었대’하는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사제가 되어 만났을 때 그와는 대화 방법까지 애매한 때가 많았다. 반말로 안부를 묻다가도 어느샌가 ‘신부님’하고 존댓말을 하기도 했다. 선지자(先知者)들은 제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고 했던가?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리인데도 ‘신부님’으로 시작되면 금세 대화의 주제가 정화(淨化)되어선지 세속적인 이야기는 묻지도 않은 터였다. 장남으로서 그가 무엇을 고민하였는지도 묻지 못하였다. 주례를 부탁하면서 하느님 나라 분으로만 바라보았던 게 늘 미안했다.
명동 주교좌성당 장례미사에 참석하는 데 1시간 전인데도 빈 좌석은 없었다. 여섯 분의 주교님들이 돌아가며 서 신부의 영면과 부활의 신비를 축원하였다. 69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는 게 안타까웠다. 성가대의 영원한 삶에 대한 곡조가 애잔했다. 정순택 대주교님이 찬찬한 어조로 서 신부의 약력을 ‘사제로서 특수한 경우’라고 소개하였다. 장남으로서 신부가 되겠다는 말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기 어려웠던 서 신부는 군종 신부님의 도움으로 오류동에 있는 ‘예수 수도회’에 머물면서 신학교 입학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곳은 사제 서품을 받고 40년 동안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서 신부가 수녀님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며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했다. 대주교님은 특별히 수녀님들에게 힘주어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함상(艦上) 생활 2년 차에 하느님의 소명을 체험했다는 이야기는 서 신부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별이 쏟아졌을 바다 한가운데에서 소명 체험이 궁금했지만 그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서 신부는 본당 사목을 마치고 다시 해군 군종감으로 복무했다. 서 신부는 사창가의 여인을 포함하여 그늘진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던 이들을 위한 ‘막달레나의 집’에서 지도신부를 맡고, 가톨릭 신자의 재교육기관인 '꾸르실료'등 특수 사목에서 성소(聖召)를 행하셨다. 해군 군함 위에서 서 신부는 순교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더욱 낮은 곳에 두던 사제로서 말 수도 적은 서 신부는 찬양 피정과 잘 어울리기도 했다. 부족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뻐하였으리라. 역사 속의 순교자들처럼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살아있는 순교자로 남아있다.
신학교 동기 신부님의 고별사가 이어졌다. 서 신부는 수녀님들의 간호를 받으며 병원으로 가기보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부르심을 받겠다고 했다. 병문안 온 신학교 동기에게 "사랑한다. 그런데 어색하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군인정신이 몸에 밴 신부님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왠지 낯설었으리라. ‘감사와 사랑한다’라는 말이 적힌 메모를 동기 신부님들께도 전하였다.
진달래꽃이 만발한 용인 천주교 사제 묘역에서 하관식을 하는 동안 수도자들과 ‘부활의 신비’ 묵주기도를 바쳤다. 죽음이라는 의식이 한 생(生)을 정의하는 것 같았다. 관 위에 유가족과 수도자들이 한 삽씩 흙을 넣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4월의 봄처럼 화려할 것도 없고 슬퍼할 일도 아닌 듯했다. 서 신부는 담담한 심정으로 저세상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말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부활의 신비’에 대한 어느 수녀님의 ‘죽음은 시작이지. 죽어서도 기도해야 하는 거야’라는 말씀이 알듯 모를 듯했다.
100세를 살아 본 김형석 교수는 ‘남을 위해 산 일만이 남는다’고 하셨는데 서 신부가 그런 삶을 사신 분 같았다. 내 한 몸 추스리기 버거워하며 살아온 게 부끄러웠다. 언젠가 신앙심이 나약함을 서 신부에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신심이 미더워 보이지도 않는 나였다. 나의 한계를 짐작한 듯 "신부인 친구 덕으로 천당에 가는 수도 있어~" 하며 농 같은 위로를 주었다. 아내의 신심에 기대 사는 불쌍한 어린양(羊)으로만 여겼을 것 같았다. 그 사랑과 위로의 말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새벽 미사에 서 신부를 위한 연미사를 올리고 아파트 옥상에서 플라스틱 화분에 쌈채 씨앗을 파종하였다. 먹먹하기만 한 부활절의 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