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파티 직전이라 라틴댄스학원에서 레슨을 받는다. 그동안 배운 룸바, 삼바를 파티에서 제대로 선보이는 게 아내가 원하는 레슨이었다. 대부분의 라틴댄스는 왈츠에서와 같은 홀딩 없이 각자 잘해야 한다. 최소한 남성의 어설픈 리드라도 무엇을 하려는지 여성은 눈치로라도 알아야 춤 모양이 난다. 라틴 리듬과 템포 모두 왈츠보다 두 배는 빠르지 않을까. 일일이 동작이름을 알려줘 가며 춤을 출 여유란 없다. 화려한 라틴 의상이 보기 좋지만 체인징파트너한 남성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댄스파티를 앞두고 강사가 팁을 주고 싶었나 보다. 먼저 룸바를 아내와 나 한 번씩 추어보고 강평을 한다. 나의 리듬감은 10% 안에 들만큼 좋고 박자를 잘 듣는다고 했다. 강사는 그런 말을 원래 안 하는데 인정할만하다고도 했다. 남성인 강사의 칭찬의 말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데, "그런데 제가 여자라면 선생님과 춤을 추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덧붙인다. 평소 나에 대한 아내의 푸념이 강사의 입에서 나왔다. 아내로부터"스마일! 미소를 지으세요"하는 말은 수도 없이 듣던 터이다. 강사는 작정하고 말한다. "춤은 즐거운 소통이어야지, 시험 보듯이 춤을 추시네요" 내 약점을 콕 집은 얘기를 웃으며 듣다 보니, 나만 모를 뿐 심각해 보인 모양이다.
홀딩이 찌그러지지 않고 거리간격을 유지하려면 상대방과 눈을 맞추어야 하는데 나의 눈이 무섭다고도 했다. 루틴순서를 틀리지 않으려 집중하는 눈빛은 사랑의 춤이라는 룸바, 요란스러운 삼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표정이 굳어있어화난 듯한 나를 보고 싶지 않아 거울도 잘 안 보는 편이지 않더냐. 나이가 들수록 일부러라도 웃지 않으면 우울해 보이는 게 또래들과 비슷하다. 평생을 실천하지 않은 일은 춤추는 중에도 고쳐지질 않는다. 춤을 춘다면서 동작이 틀릴까 걱정하는 옹졸함이라니. 어떤 경우에도 미소 지을 여유가 없다면 '댄스 라이프'는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웃는 얼굴로 춤을 추는 장점이 있는 아내에게도 강사가 한마디 팁을 던졌다. 아내와 삼바를 춘 뒤 무겁다고 했다. 여성에게 무겁다고 대놓고 말하다니...
나비처럼 사뿐 날아가고 싶은 여인에게 무겁다는 말은 금기에 속한다. 그런 말은 입밖에 내는 순간 무언의 전쟁이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 순간 사태를 살폈지만 아내는 별반 동요도 없다. 아내는 강사의 말에 미소 지으며 잘 듣는 모범생이다.
라틴의 어깨선은 모던과 달리 옷걸이모양으로 팔을 내려두어야 파트너를 누르지 않는다'라고 하는 강사의 설명은 납득할만했다. 왈츠에서 팔을 수평으로 들어야 하는 자세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팔을 떨어뜨리지 않기까지 프로선수가 아닌 한 5년 이상 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홀딩을 넓고 반듯하게 하는 모던과 리버럴 한 라틴의 춤은 자세와 느낌부터 다르다. 모던, 라틴 전문학원이 따로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춤동작 때 말을 건네면 남성이 집중을 못한다는 주의도 주었다. 이것은 내가 아내에게 하던 불평이었다.플로어에서 진행시킬 루틴에 집중하기도 버거운데, 여성파트너가 말을 건네거나 코치를 하면 남성은 순서와 피겨를 모두 잊는다. 듣고 있자니 내 속이 다 시원해 팔짱을 끼고 웃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강사가 다 해준 셈이었다.
강사에게 고마웠고 레슨의 가치가 새삼 돋보였다. 전문가답게 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게 세상이치이다. 옆에 강사를 두고도 서로 네 탓이라며 열을 올리다니 바보가 따로 없었다. 진즉 깨달았더라면 오랜 댄스 세월에서 다툴 일이 없었으리라. 남의 말을 제삼자(三者) 화법으로 설명하는 게 강사의 큰 덕목이다. 부부레슨 중에 다투지 않은 비용도 수강료에 포함되어 마땅했다.
또 다른 팁. 손을 세게 잡는 파트너에게는 아예 손의 악력을 풀어버리라고 했다. 상대는 저절로 손에서 힘을 빼게 된다. 그리팅댄스에서 악력이 센 여인을 맞닥뜨렸을 때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강함에는 부드러움이나 무저항이 효과적이다. 체인징파트너와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선 상대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 홀딩의 강약, 텐션의 전달까지 다양하다. 기량의 정도나 춤에 대한 철학은 말할 것도 없이 조심스럽다.
프로선수들처럼 컨택을 통해서 리드를 주고받기 위해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세심한 곳까지 민감한 게 춤이다. 춤을 추며 원투쓰리 카운트를 불러준다거나 여성이 리드하면 이미 춤이 아니다. 반대로 블루스 음악인 때 서로말도 걸지 않으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자신은 잘하고 있는데 상대가 안되기 때문이라는 뿌리 깊은 자만심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겸양의 말만 되뇌는 파트너는 또 어떤가? 결국 온몸으로 전달되는 느낌으로 편안한 파트너를 찾아 헤매는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아내와 평생파트너인 편이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큰 복인 줄 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