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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by 팀 비카리TIM VICARY

by 이용만

1999년 해발 8,850m인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멀지 않은 8,155m 북벽 지점이다. 5명의 산악인들이 조지 멀로리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다리가 부러진 채 언 땅을 파내던 손가락이 사고 현장 상황을 말해준다. 그의 옷은 현대 산악인의 복장과는 많이 달랐다. 에베레스트의 가장 큰 문제는 고도이다. 산소탱크의 잔량이 생사를 가른다. 부족한 산소는 호흡만 힘든 게 아니라 판단력마저 잃게 한다. 영하 20⁰와 최소 100km 이상인 강풍에 체감온도는 살인적이다. 수색대원들은 오래 머물 시간이 없다. 시신의 사진을 찍고 호주머니에서 고글과 유품들을 수습하였다. 기도를 올리고 커다란 바위로 무덤을 만들었다. 등반가들이었다.

1950년까지는 히말라야 북쪽 티베트에서만 등반이 허락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에베레스트를 '초모룽마'라고 불렀다. 세상의 어머니 신이라는 뜻이다. 남쪽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 즉 하늘의 신이라 불렀다. 1830년 영국 군인인 조지 에베레스트가 인도에서 지도를 만들며 히말라야 봉우리들의 높이를 측정하였고 훗날 그의 친구가 '초모룽가'가 최고 높이인 점을 밝히고 친구 이름인 에베레스트라 명명하였다.

1921년 티베트에서 오르막길 500km를 걸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해발 4,800m 롱북Rongbuk 사원까지는 한 달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그곳에서 롱북 빙하로 등반을 시작하였다. 1921.9.23 멀로리 일행 3명과 3명의 포터는 7,000m에서 호흡곤란과 강풍으로 철수하였다. 이듬해 1922년 눈사태로 7명의 포터가 희생된 채 철수했고, 1924. 4월 12명 등반대와 150명의 포터로 다시 도전했다. 새로 내린 눈으로 곳곳에 있는 크레바스들은 숨겨져 있었다. 많이 내린 눈으로 포터들은 하산을 포기하였고 공포와 추위 속에 텐트에 고립되었다. 등반을 뒤로하고 포터들을 먼저 구조해야 했다. 300~600m마다 베이스캠프들을 만들어 음식과 산소탱크 등 1인당 18kg의 짐을 옮겼다. 산소를 사용하면서도 한 걸음 옮길 때마다 2~3번 호흡을 하여야 했으므로 정상 부근에서는 100m 오르는 데 3시간이 걸리고 내려오는 데도 2시간이 필요했다. 해지기 전까지 캠프에 도착하는 일이 생사를 가를 만큼 중요했다. 캠프5를 출발한 노톤과 소머빌은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소머빌은 호흡곤란에 핏덩이를 토해내고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노톤의 눈이 점점 더 나빠지고 도끼가 두 개로 보였다. 정상까지 275m 남았다. 소머벨을 남겨 둔 채 홀로 오른 노톤마저 8,575m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손가락이 동상으로 퉁퉁 부어오른 포터는 손을 쓸 수 없었고 숨을 쉴 수가 없는 노톤도 동상이 심했다. 6월 1일 2개 조로 재도전에 나서며 멀로이와 부르스가 먼저 출발하고 오델과 어닝은 다음날 뒤따랐다. 노톤과 소머벨은 캠프6을 설치한 작은 텐트에서 산소 없이 밤을 지내기로 하고 포터들을 내려보냈다. 이른 아침 출발한 그들은 8,536m의 경치에 감탄하였다. 그들의 발아래는 부드러운 눈과 돌밭이어서 실수하면 롱북 빙하까지 수직으로 2,743m를 떨어진다. 소머벨은 숨쉬기조차 힘겨워 노톤 홀로 올랐다. 올라갈 수는 있더라도 다친 눈으로는 돌아 내려올 수 없다. 8,575m에서 노톤은 내려가며 소머벨과 함께 캠프 4에 도착했을 때 그의 눈은 볼 수 없었다.

닷새 뒤 6월 6일 멀로이와 어빙이 이번에는 산소를 갖고 캠프5를 향해 올랐다. 8명의 포터들이 음식과 산소를 운반했다. 다음날 캠프6에는 4명의 포터와 함께 올랐다. 그날 밤 멀로리는 캠프5에서 촬영을 맡고 있는 노엘에게 "내일 8시에 촬영하기 좋은 암반 위나 스카이라인에서 우리 모습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일찍 출발하겠다"라고 메모를 남겼다. 뒤따라 캠프6을 향하던 암석 연구가인 오델에게도 메모를 남겼다.

7,900m 텐트 주위에서 오델은 에베레스트를 바라보았다. 구름이 잠시 걷혔을 때 정상 바로 밑에 점 2개가 눈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멀로리와 어빙이었다. 그리고 구름이 다시 모든 것을 가렸다. 시계는 오후 12:50분을 가리켰다. 오델은 약간 늦은 시간이 아닌가 생각했다. 정상을 도달한 후 밤중에라도 캠프6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오델은 캠프6에 음식을 남겨놓고 정상 쪽으로 더 올라가며 소리쳐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비좁은 텐트에 3명이 있을 수 없으므로 오후 4:30분 오델은 캠프4로 복귀했다. 오후 7시가 지나고 있었다.

이튿날 캠프4에서는 캠프5,6을 볼 수 있는 데,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오델은 포터 두 명과 함께 캠프 5로 올라갔으나 포터들은 기상악화로 더 이상 올라가기를 거부했다. 오델은 홀로 캠프6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텐트는 닫혀 있었고 음식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멀로리와 어빙은 사라졌다. 2시간 동안 정상을 향해 오르며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었다. 오델은 슬리핑백을 펼쳤다. 실종된 등반가의 슬리핑백은 T자로 땅에 뉘어져 아래 캠프에 메시지를 전한다. 1933년 8,460m 지점에서 어빙의 도끼가 발견되었다. 멀로리와 어빙에 관한 의문들이 밝혀지기를 고대했으나 알 수 없었다.

1950년부터는 티베트에서 등반이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네팔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었다. 1953년 영국 원정대 존 헌트는 톈징 셰르파와 350명의 포터와 함께 원정대를 꾸렸다. 17일간 여정 끝에 티양보채 Thyangboche사원에서 뉴질랜드 등반가인 에드몬트 힐러리, 조지 로이Lowe와 합류했다. 쿰부 빙하를 향한 300m 쿰부Khumbu 빙폭 루트를 택했다. 8,500m 로체Lhotse봉 왼쪽이 남쪽 협곡이다. 로이Lowe가 남쪽 협곡 South Col에 도착한 후 힐러리와 텐징외 17명의 셰르파 일행은 7,925m에 캠프8을 세웠다. 10시간 동안 먹고 마시지도 못한 채 셰르파는 캠프4로 돌아갔다. 1953.5.22 8,338m에서 헌트와 남걀 셰르파는 되돌아가야 했다. 얼음이 산소 흐름을 막아 호흡곤란이 심해졌다. 이어진 정상 도전에 나선 보딜론과 에반스는 8,750m에서 마지막 암벽 등반 중이었다. 수직 고도 100m를 남기고 산소 잔량이 부족했다. 정상에 오르는데 3시간, 남쪽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2시간 외에도 캠프8까지 900m를 산소 없이 가야만 했다.

돌아서야 한다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옳은 결정이었다. 하산하며 에반스가 탄환처럼 미끄러지며 둘 다 거의 죽을 뻔하였다. 얼음도끼를 눈 속에 박아 넣고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엿새 뒤인 5월 28일 원정대는 더 많은 산소와 음식을 위한 캠프9를 설치했다. 마침내 힐러리와 텐징 셰르파는 남쪽 정상 부근 8,506m에 캠프9 텐트를 세우고 영하 27⁰와 150km 강풍의 밤을 견뎌야 했다. 다행히 새벽 4시부터 하늘이 개고 태양도 뜨니 4,878m 아래 사원도 볼 수 있었다.

힐러리는 놀랍게도 등반을 즐기고 있다고 느꼈다고 훗날 말했다. 봉우리 너머 또 봉우리들이 나타났다. 암벽이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았다고도 했다. 마침내 더 오를 곳이 없었다. 11시 30분 힐러리는 영국 네팔 인도 UN 기를 든 셰르파 텐징의 사진을 찍었다. 힐러리는 동서남북 전경을 담았다. 그들은 눈 속에 구멍을 파고 깃발, 텐징의 딸의 연필 그리고 힐러리의 예수 십자가를 묻었다. 그리고 그들은 혹시 29년 전 멀로니와 어빙이 무언가 남겼는지 찾아보았다. 150km 강풍에 남아 있을 수도 없어 보였다. 다음날에는 캠프4까지 돌아왔다. 서로 돕고 이뤄낸 쾌거임을 잘 알므로 모두 행복했다.

1999년 조첸 햄레브 일행 5명은 멀로이와 어빙에 관한 오랜 의문을 풀기 위해 등반했다. 멀로리가 영국을 떠날 때 부인에게 약속한 일이 있었다.

“나는 매일 당신 사진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가지고 오지는 않겠다. 정상까지 사진을 갖고 가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그곳에 묻을 생각이다.”

그의 말처럼 그의 시신 호주머니에서 고글과 편지 등 유품 중에 부인의 사진은 없었다. 정상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 도중에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무리도 아니었다.

힐러리 이후 많은 등반가들이 정상을 정복했다. 1975년 중국의 400명 원정대는 금속 삼각대를 정상 바위에 고정시켰다. 레인홀드 메스너는 1924년에 노톤이 8,575m를 산소 없이 등반한 것을 기억하고 홀로 무산소 등반을 도전하였다. 일주일 식량만 싸 들고 추락사고를 이겨내며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그러나 겨우 하산하고서 여자친구가 기다리던 캠프에서 깨어나지는 못했다. 스웨덴의 괴란 키로프는 자전거를 타고 와 산소 없이 등반하고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스웨덴 집으로 돌아갔다.

멀로리와 어빙이 1924년 아마 최초의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고 하산하는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고 믿는 많은 산악인들을 저자 ‘팀 비하리’는 대변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1921년 멀로이 등 영국 원정대들이 처음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티베트 사원인 롱북에 이르렀을 때 수도자들은 그들이 왜 오르려 하는지 이상한 듯 크게 놀랐다.

8078m 안나푸르나는 에베레스트의 서쪽으로 약 400km 지점에 있는데 아름다운 산으로도 유명했다. 1978.8.6 미국 여성 등반가 알렌 불룸의 11명 원정대는 최초로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려고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첫 공격조로 이렌느와 베라 카르마코바가 10.15 오후 3시 30분 성공했으나, 두 번째 공격조는 추락사고로 희생되고 말았다. 10명 중에 한 명 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히말라야는 지금도 용감하고 강인한 영혼들이 사랑하는 곳이었다.


K2에서 희생된 산악인들의 영상을 보며 등반가들을 애도합니다.

https://youtu.be/5OcXIaiA-mA?si=pFzHzdbWppWLYx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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