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파체코 파르도
라몬 파르도는 영국 킹스칼리지 국제관계학 교수로 스페인 출신이다. 한국에 유학생으로 온 지 20여 년 만에 <새우에서 고래로>를 내어놓았다. 국제관계속에서 한국학 전문가가 보는 한국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아 한국어판을 24.3월 발간했다. 그는 스페인과 한국의 근세사에서 닮은 점이 많다고 책에서 썼다. 파르도가 살았던 스페인의 내전과 전체주의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2003년 유학생으로 온 저자가 한국 5100만 인구 국민소득 41,960달러 평균연령 43.7세 기대수명 83.2세(2022년 기준)를 20여 년 전 자신의 조국 스페인과 비교할지도 모른다.
'새우와 고래'는 놀라움의 언어로 비교할 만하다. 한국이 대단한 나라인 줄을 우리만 모른다는 말도 듣는다. 전후 70년,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둔 한국이 북한과 극명하게 다른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해외를 나가보면 실감한다지만 무덤덤하다. 한국에 일자리를 구하러 쇄도하는 현상도, K한류의 활약도 무신경해졌다.
살아남느라 잊힌 과거로 치부했다. 역사발전단계를 밟아가는 것인가. 세계 도처 국가들의 최근세를 살아가는 속사정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미디어를 통해 경계가 없어진 때문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잘 된 일이었나? 정답은 있었는가?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왔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갈 한국인이다. 이 책 곳곳에서 고대 조선과 한국 근대사를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는 좋은 기회로 읽혔다.
서평이 화려하다. 세계 열강의 승패를 결정할 제3의 고래 한국 그 변화의 동력은 무엇인가?
- 지독한 빈곤과 트라우마를 딛고 전후 도약하는 한국의 모습을 담아냈다 (가디언)
-긴밀한 외교와 전 세계의 청중에게 사랑받는 모습에서 한국의 위대성을 포착했다(파이낸셜 타임스)
-다른 나라들이 수세기 혹은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한 업적을 수십 년 만에 성취한 한국의 여정을 보여 준다 (김은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목차
프롤로그 :한국역사의 개괄
독립과 전쟁, 그리고 가난:1948~1960
박정희시대:1961~1979
부와 민주주의를 향하여:1980~1987
자유와 위기:1988~1997
진보주의 10년: 1998~2007
글로벌한국:2008~2023
에필로그: 한국의 미래
옛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기원전 2333년 개천절로 기념한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발해로 이합집산된 국가는 고려왕조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고려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왜구를 물리쳐야 했고 고래사이에 낀 새우신세가 되었다. 1270~1356 몽골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1388년 전쟁영웅 이성계는 신흥 명나라를 치라는 어리석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친명 유교 양반의 조선시대를 열었다. 1592년 임진왜란부터 조선후기 만주족의 두 차례 침입(병자호란 정유재란)에 굴복했다.
만주족과 일본 왜구에 끼인 새우 신세에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보호를 받게 된다. 1756년 아리랑이 한반도에 평화와 고요의 시대임을 노래하고 부를 축적한 상인계급의 등장은 새로운 정치권력의 파벌주의를 불러왔다. 1860년 동학운동으로 평등사상이 확산되고 1894~95 청일전쟁은 1894년 갑오개혁(계급제, 노예제폐지 능력주의 독점폐지 한글사용)의 몸부림을 불러왔다. 조짐은 진즉에 있었으나 우물 안 개구리로서는 밖의 세상을 알지 못했다.
서구 제국주의가 동으로 밀려오던 급변의 시기에 일본은 1853년 미국전함의 개항압력에 오히려 순응하며 1868년 서구화로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조선은 1866년 미상선 제너럴셔먼호에 무관심했고 1876년 일본에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여야 했다. 1882년 선교사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는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 조선의 쇄국정책을 언급했고, 1885년 미국 사업가 퍼시벌 로웰이 쓴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도 평화로운 풍경이 묘사되어 서구에 널리 소개되었다. 아무도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잡아 먹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브nive한 순둥이 조선의 상황을 빗댈만한 책이었다. 적어도 역사 연표는 적나라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1895.10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896 독립신문이 한글로 창간되었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공화세력 독립협회를 해산하는 한편 1899년 전차와 철도로 근대화개혁에 안간힘을 썼다. 1894년 청일전쟁 승리로 착착 진행된 일본 군국 제국주의 유혹은 1904~1905 조선과 만주영토를 놓고 러일전쟁에 연승하였고, 이후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조선은 고래의 세상에서 새우가 되고 말았다. 외교와 군대를 빼앗긴 519년 조선왕조는 1910.8 합방으로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총독은 서울을 게이조(경성)로 바꾸었고, 토지조사로 일본인 지주밑에 소작농 신세가 되었다.
1919.3.1 두 달 전 고종황제의 죽음과 분노한 민족자결주의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유관순을 비롯 전국에서 봉기했고 4.11 상하이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25년 서울에서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고 이듬해 순종장례식에 6.10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무성영화 아리랑 개봉과, 1936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은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우승 월계수로 유니폼의 일장기를 가리고 일본국가제창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준비되는 가운데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표하고 5백만 명의 강제노동과 수만 명의 10대 소녀의 성노예로 만들고, 1939년 창씨개명과 1941년 한국어과목을 없앴다.
독립과 전쟁, 그리고 가난:1948~1960
박정희시대:1961~1979
부와 민주주의를 향하여:1980~1987
79.10.26박정희암살 2개월 뒤 12.12군사반란으로 체포된 정승화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가 더 이상 전두환의 위협이 되지 않는 이듬해 1981년 사면되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안전기획부로 개명하며 수장인 전두환은 80.5.15 서울역 10만 시위로 계엄령을 연장하고 3일 후 80.5.17일 국회를 해산했다. 부랑자 재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삼청교육대에는 정권의 눈밖에 난 이들도 포함 6만 명이 수용되었다. 투옥된 3김과 김대중사형선고는 미국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입으로 20년형으로 낮아졌다. 8월 최규하 대통령 하야하고 81.2월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등 경제자유화와 재벌의 경쟁력을 강화한 조치는 고도성장을 이끌었고 중산층 증가와 함께 사회변화로 귀결되었다. 국영방송 KBS의 83.6.26 이산가족 찾기는 138일간 이어졌다. 뉴욕타임스는 '전쟁으로 흩어진 한국인들이 마침내 가족을 만나다'라고 보도했다.
83.10.9 미얀마 아웅산묘소에 전두환이 도착하기 전 북한공작원이 누른 원격폭탄으로 21명이 사망했다. 72.7.4 남북공동성명은 허울뿐이었다. 왜 북한은 전두환 암살을 시도했을까. 아웅산테러 한 달 전 소련이 대한항공여객기를 격추하여 269명 전원 사망했을 때, 한국의 북한에 대한 보복시도를 미국의 레이건이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반전이 일어나는가? 84.8 남측은 제품과 기술제공을 84.9 북측은 적십자구호물품을 주고받았고 85년에는 DMZ를 오가며 상봉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경쟁은 무의미했다.
86 아시안게임에 중국을 제외한 모든 공산국가들이 보이콧하는 가운데 북한간첩이 김포국제공항에서 폭탄테러를 벌여 5명이 사망했다. 서울올림픽도 참을 수 없었던 북한은 87.11월에도 두 북한공작원이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는 여객기를 폭파해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절박해진 김일성의 올림픽 보이콧 요청에 쿠바 한 곳만이 받아들였다. 이미 한반도와 한국은 세계에서 체제비교의 시금석이 되어있었다.
선진국은 돈만 많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적법성이라는 허울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80년대는 민중운동의 전성기였다. 독재정권은 독립운동에 비유되었고 김산(실명 장지락)의 1941년 회고록 아리랑은 1984년에 한국에서 출판되었지만 권력에 저항하는 저작물로 간주되었고 미군사령관의 통제하에 있으므로 1982.3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최악을 맞는다. 85년 선거에서 3주 전에 창당한 신한민주당 김대중 등은 선거직후 해금되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86.11 평화의 댐 건설은 북풍 기만으로 해석되고 있다.
1987년 최루가스 속 이한열사망 6개월 후 치러진 자유선거는 80년 수정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노태우를 87.4 간접선거로 후계자로 삼을 계획이었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자 당을 만들었다. 마르코스의 필리핀은 86.2월 에드사혁명으로 민주사회가 되었다. 박종철사건과 넥타이부대 386세대는 6.29 노태우 항복선언인 직선제개헌을 이끌어냈다. 87.10 제9차 수정 헌법하에서 89% 투표율이었다. 득표율 37% 노태우는 28% 김영삼 27% 김대중 8% 김종필 등 야당의 분열로 대통령이 되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제5공화국경제 주역인 이병철이 선거 한 달 전 사망했다.
자유와 위기:1988~1997
진보주의 10년: 1998~2007
글로벌한국:2008~2023
에필로그: 한국의 미래
이념적 갈등과 세대 간 분열은 한국 사회 엄연히 존재한다. 코로나에 대한 대처 역량과 디지털 개방성을 기준으로 모든 OECD 정부 중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위상은 필수적인 정부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기도 하다. 이민은 주로 한국인들이 더 이상 원치 않는 일자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이민은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정의할 것이다. 한국에서 보수 세력은 점차 그들의 입장을 상대 진영의 입장에 가깝게 수정해 나가고 있다. 한국은 유산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미래가 몰고 올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다.
https://youtu.be/ilSyk9z7YUg?si=YajDIBNZ-1AKas2Q
https://youtu.be/hy2Zr5ryWTo?si=nQMqz6nYKRd07k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