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후 집에 들어가려는데 아내가 멈춰 섰다. 응시하는 곳을 따라가 보니 우리 아파트 라인 주차하기 좋은 자리에 한 자리가 비었다. 아내가 집에 들어가서 차키를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빈 주차 공간에 서있으라는 거였다. 내가 키를 가져오려 했지만 아내는 핸드백 안에 있다고 본인이 갔다 오겠다고 했다. 2분도 안 걸릴 일이니 내가 자리를 맡고 있는데 반 트럭 같은 시커먼 외제 차가 나를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집사람이 키를 갖고 오는 중이라고 말했다. 차 안의 남자에게 제대로 양해를 구하고 싶었으나 너무 어두웠다. 곧 키를 갖고 내려올 아내를 생각하며 망설이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하긴 좀 전에 젊은 목소리는 차를 들이밀며 자기가 대겠다고 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하고 볼멘소리도 창을 넘어 들려왔더랬다. 그 차는 방향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10여 초쯤 대치상태가 계속되었다. 어지간하면 양보해 주기만을 기대한 것이다. 융통성이 없나 싶어 다시 차를 옮겨주면 좋겠다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자칫 아내가 차키를 갖고 내려와도 작정하고 진입하려는 차가 있으니 차를 댈 방법도 없어 보였다. 아내에게 그 잠깐사이에 다른 차가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치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시 양해를 구한다고 하니 낮게 깔린 목소리는 '성깔이 x 같은 놈이라서요' 하며 말끝만 존댓말을 붙였지 욕으로 들려 그 말을 되물었다. '그래? 그러면 여기다 대'라고 나는 언성을 높였고 그가 바로 그의 차를 주차시켰다. 아내가 내려와 무슨 일인가 싶은 때, 벌써 나는 그에게 몇 동에 사느냐고 다그쳤고 어둠 속에서 그는 말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그 말도 맞다고 하면서도 나는 이 아파트 거주자가 맞는지 알고 싶다고 버티었다. 부부를 상대하기도 버거웠는지 '뺄게요'하며 바로 차를 후진시켜 나갔다. 그 와중에 다른 차량이 결국 주차했고 이래저래 분이 풀리지 않았는데 아내는 벌써 라인 경비원에게 전화를 걸어 신상을 파악했고 말버릇 못된 놈이라고 했다. 경비원은 옆라인인 50X호에 부모도 살고 있다며, 까칠하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나쁜 성품인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 차가 커서 주차에 애를 먹어 발판까지 떼어 냈다는 일화까지 듣게 되었다. 아 그런 애로가 있었나 싶었다. 화는 누그러졌는데 왠지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TV뉴스에서 마침 '주차 빌런'에 관한 시시비비들이 끊이지 않아 관련 입법안이 상정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빌런은 총잡이 악당이라는 뜻인데 하도 많이 쓰이니 '신종 악한'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잠시 키를 갖고 올 테니 기다려달라는 그것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해서 융통성도 없고 말버릇도 나쁜 놈이라고 화를 돋우고 있으니 나야말로 전형적인 꼰대 짓을 보인 것이다. TV화면에서 본 것처럼 꼭 커다란 종이박스에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이곳에 주차하지 마세요'라고 적어놓은 '주차 빌런'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융통성을 운운하고 있던 것도 우스웠다. 반나절도 안 돼 '주차 빌런이 바로 나'라는 결론만 남았다. 한 달간이나 집을 비워야 하던 때, 이곳은 새들이 똥을 싸 놓는 자리, 저곳은 땡볕에 그늘이 없다던가 벚꽃 잎이 차창에 달라붙는다던가 진드기가 꼬이는 자리 등등 우리와 입주민들 생각이 비슷했다. 아까 그 자리는 역시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사소한 법과 규범에 대해서도 룰을 지킬 때 아름다운 문화국민이 될 터인데 거꾸로 내 분을 삭이는 일이 커 보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주차 빌런? 주차뿐 아니라 사소하다고 생각할수록 각종 '빌런'이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하철 빌런은 ‘세금만 축내고 공짜로 타고 다니는 보기 싫은 노인네’라는 식으로 폄하하는 은어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과 마음가짐에 철저해야 하겠는데 쉽지 않음을 아쉬워만 하고 있었다. 한 동에 사는 그 젊은이를 다시 만날 것 같다. 마음 빚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