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만 Jul 25. 2023

봉숭아 손톱

 딸네가 가져온 봉숭아 씨앗이 싹 틔운 지 석 달쯤 되었다. 쌈채 곁에 파프리카 모종도 키우니 갓 네 살 손녀의 식물 체험장이 된 터였다. 봉숭아 꽃잎이 하나둘 늘어났고 제법 봉숭아 물들이기도 할만해 보였다. 곧 손녀에게 추억이 될 이벤트를 열 차례였다. 딸이 '다이소' 매장에서 봉숭아 물들이기 세트를 구입하라고 사진도 보내왔다.

 봉숭아 물들이기 세트는 없고, '봉숭아 빛 물들이기'를 사면 된다지만 왠지 추억의 봉숭아 물들이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뒷면 주의사항에서 만 14세 이상 사용하라는 문구를 보고 손녀의 손톱 물어뜯는 습관이 생각났다. ‘봉숭아 빛’이라는 말이 거슬려 일단 사지 않았다. 천연재료를 찾는 사람들은 없어 보였다.

 손녀가 손톱과 발톱을 입으로 물고 잘라내는 일은 나를 꼭 닮았다.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심했던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수십 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까지 내가 손톱을 물고 있던 습관을 얘기할 때 창피했다. 발톱까지 이빨로 잘라냈던 일은 오랫동안 수치스러운 나의 일급비밀이었다. 그래서 손녀에게 손톱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훈계도 기어드는 목소리였다. '너나 잘해, 할아버지부터 잘했어야지' 하는 내면의 소리가 더 컸다.

 봉숭아 꽃과 잎을 짓져 백반 가루와 섞어 손톱에 올리고 비닐과 헝겊으로 손톱 둘레를 동여매었던 모습이이 떠올랐다. 손가락까지 봉숭아 물이 번져 지저분해 보였지만 나중에는 물 든 손톱이 예뻤다. 백반을 구하러 마트도 둘러보고고 동네 약국에 들렀다. 손녀와 약속하였으니 꼭 구해야만 했다.

 봉숭아 물들일 백반 작은 것을 말하니 명반(明礬)이라고 쓰인 것을 내밀며 200g짜리만 나온다고 했다. 전에는 100g짜리도 있었다는 명반은 화공약품에 속했다. 통화 중이던 약사는 전화기 넘어 상대방과 웃고 있었다. 그 약국에는 뱀 쫓을 일도 없는지 찾는 이가 아예 없다고 했다. 네일아트 숍에서 깔끔하게 칠하는 세상에 뱀 때문도 아니고 봉숭아 물들이려 백반을 찾다니 웃을 만도 했다.

 백반 한 곽을 내려보니 봉숭아 물 들일 손녀의 닳아버린 엄지손톱이 떠올랐다. 봉숭아 물들이는 용도가 추억을 넘어 달리 생각되었다. 손톱 물어뜯는 일로 외할머니와 딸이 걱정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손녀의 정서불안이 다시 시작된 건가. 맞벌이하는 딸이 제 아이 사랑이 부족했나 하고 자책하는 것 같았다.

  2년 전에도 손녀가 머리카락을 먹는다고 얼마간 심리치료를 받았다. 외할머니 대신 잠시 손녀를 돌보는데 혼자 조용한가 싶어 돌아보니 제 머리카락을 뜯어 입으로 가져가는 게 아닌가. 이미 씹어 삼키고 있었다. 직접 보니 충격이었다. 나에게 들킨 듯 어린 손녀가 계면쩍어하는 것도 안쓰러웠다. 조심스럽게 딸에게 전하면서도 친할아버지 쪽에 머리카락 뜯은 분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하긴 진흙을 먹는 어린이도 있다던가. 다행히 그 뒤로는 머리카락 뜯는 일은 없어졌다. 이제 봉숭아 물을 들이면 손톱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명분이 통할 것이다. 예쁜 제 손톱을 보면 깨무는 버릇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손톱과 봉숭아로부터 어머니를 회상하고 있었다. 손녀가 태어난 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톱 물기도 만만치 않으셨다. 손톱깎이로 깎아 드릴 손톱은 별로 없을 정도였으니까. 늘 온화하고 때때로 단호한 어머니는 무엇에 초조하고 불안했었을까. 여러 손톱들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손톱 깨무는 일쯤이야 하면서도 혹시 유전이 아닌가 싶었다. 손녀의 닮은 구석이 어디선가 본 듯도 하고, 어느 틈엔가는 부모님을 닮은 말투와 걸음걸이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무의식까지 유전자와 무관할 수 없어 보인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요즘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제 갓난 아기를 버리거나 몹쓸 짓도 하는 젊은 엄마에 관한 불행한 뉴스들이 가슴을 저민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출산율마저 떨어진 시대에 젊은이들이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장애를 딛고 일어선  역사적 인물들 또한 셀 수 없이 많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유전자 탓이냐 싶어 빈 하늘을 올려 보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박하게 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