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10분 거리 '신라스테이'에서 SNS 단톡방에 글을 쓴다. 딸아이 부부가 예약하고 숙박비도 냈다니 고맙다고 빨리 전하자.
'잠은 잘 잤고 아침식사도 깔끔하구나. 역시 브랜드가 주는 시스템이 좋아선지 네 엄마도 편안해한다. 너희들이 선택 잘했다~^^ 좋은 하루!'
일주일정도 주방 수리와 도배를 새로 하며 잠시 집 근처 호텔에서 며칠 묵는다. 여행 온 셈 친다. 매일 아침 침대 시트가 정리되고 식사 고민도 없다. 평소대로 내 주장을 하다 보면 딸네집으로 갈 뻔했다. 말 꺼내는 것도 민폐인데 아내 말 듣기 천만다행이다.
전혀 이사 갈 계획은 없는데 정리하며 버릴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주방과 도배는 업체에 맡긴다 해도 짐 정리는 스스로 할 일이다. 아내와 의견을 조율하며 정리하는 게 더 어렵다. 이미 결정장애가 왔다. 내가 정리할 수 없으니 견적가격을 묻지 않는다.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아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할 일이다. 순리대로 살자. 군말 없이 우선 책장의 책들부터 절반 이상 버렸다. 구닥다리 골프채를 또 만지작거린다. 값을 대략 알므로 버리긴 아깝다.
주방 쪽 수리는 끝나가니 도배할 차례다.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롭다. 새로 붙인 창호지는 팽팽했다. 한입 가득 머금은 물을 뿜어주니 무지개가 생긴다. 도배풀을 끓이면서 긴 주걱으로 눌어붙지 않게 젓는다. 바닥에 도배지를 겹겹이 펴고 그 위에 풀을 부어 바른다. 양쪽 끝단을 조심조심 들어 붙인 후 가운데로부터 빗자루질을 해서 기포를 빼낸다. 천정 붙이기가 특히 어렵다. 뒤로 젖힌 목근육이 생각만 해도 뻐근하다.
“이 기계는 도배지 자르는 건가요?” 방직공장에서 본 편물기처럼 보인다.
"만능이. 이 기계로 품이 많이 줄었지요."
도배풀 먹이는 기계이름이 '만능이'다. 도배 3인조의 배 반장이 31년째 하는 일이다. 전문가의 얘기는 들을 게 많다. 도배지 전체를 풀칠해선 안된다. 원하는 만큼만 가장자리에 기계가 미리 풀을 방출하고, 도배지를 넣으면 풀칠되어 나온다.
내심 셀프도배 한번 해볼까? 속마음 일뿐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다. 그저 이전 경험들이 헷갈리게 할 뿐이다. 문득 '만능이'가 "너만 과거 속에 살고 있어"라고 하는 듯하다. 허 참! 말수마저 줄어든다. 심란하게 뜯긴 벽지와 먼지를 피해 밖을 걷는다.
이른 아침부터 12명 여성들이 분주하다. 왁자지껄 가구를 재배치하고 정리 중이다. TV에서 ‘신박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신애리’와 ‘박나래’가 연예인들의 집정리를 한 후 깜짝 놀라게 변신해 있다. ‘신박하다’는 ‘새롭고 놀랍다’라는 뜻의 신조어다. 두 사람 이름의 첫 글자를 따와도 ‘신박한 정리’다. 우선 과감하게 버림으로써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의류, 주방, 서재, 창고, 액세서리, 속옷 이름표까지 흩어져 정리하는데... 아~ 이건 아니다. 북새통이 따로 없다. 그냥 전쟁이라도 난 듯 12군데에서 버릴 건지 아닌지 빨리 정해달라고 한다. 벌써 아내는 혼비백산이다. 나도 이미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피난길 보따리에 넣을 우선순위처럼 이곳저곳 내몰린다. 며칠 전 버릴 책 골라내던 때와는 다르다. "어차피 쓰지 않더라고요" 라며 한마디 듣게 된다. 오늘 중에 작업자들은 퇴근하고 그걸로 끝이다. 골프채 뭉텅이도 보관하던 가방째로 버려졌다.
눈에 안 뜨이니 더 이상 고민도 없다. ‘일체유심조’ 마음먹기 달렸다지만, 일체 내 눈에 달려있으니 ‘일체유안조’이라고 해야겠다. 내다 버리려다 보면 안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엇비슷한 상황을 공감하는 것을 보니 결정장애도 그냥 우울증 같은 현대병인가 싶다. 어쨌든 미적거린 탓이다. 호주머니에서 거금이 빠져나가야 정신 차리는 격이다. 착잡하다.
나의 손을 떠난 일들이다. 새로운 생활패턴을 찾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타인에 의해 정리된 것이다. 나는 반쯤 죽은 목숨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신박’하게 죽었다. 야단법석인 집을 피해 나선다. 겨울이 아직 멀고 바람이 없는데도 낙엽들이 우수수 비처럼 수직으로 낙하한다. 낙엽은 중력조차 못 이겨 여전히 떨어진다. “떨어지는 낙엽도 나이 순서가 아니라네” 나무를 올려본다. 오헨리(O Henry) 단편 '마지막 잎새'처럼 붙어 있을 이파리는 어떤 녀석일까? 낙엽을 쓸고 있는 경비원에게 말을 건다.
"힘드시죠? 낙엽을 불어 날리는 기계도 있던데 그거 안 사준 답니까?"
"그게.. 그러면 좋겠지만, 소음이 커서요"
아파트 보다 높이 자란 나무의 잎들이 하루 한 날 동시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
"눈 오는 겨울에도 떨어져요"
"낙엽의 정취도 있으니 좀 더 놓아둬도 되지 않을까?"
"쓸어야지요. 그래도 눈보다는 낫죠. 눈은 정말 무서워요"
"비 오면 낙엽이 딱 붙어 쉽지 않겠네.."
"마를 때까지 기다려요." 첫눈 내린 낙엽의 계절에 치워 낼 눈은 무섭고, 착 달라붙은 비는 고맙다.
해를 등 뒤에 두고 서재에 앉아본다. 빛이 좋은 남향으로 큰 딸아이 쓰던 방이다. 출가 이후 빈 방인데도 수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이번 상황이 끝나니 다행이고 개운하다. 서재에 침실까지 생겼다. 길게 걸던 바지는 반으로 접히니 공간활용이 좋다. 계절마다 바꿔 걸 필요도 없다. 다만 당분간 찾는데 시간이 걸리고 아예 찾기를 포기한 게 많다. 갑자기 못 버리고 쥐고 앉아 있던 게 문제였음을 깨닫는다. 아니 깨달음이라도 애써 찾아야 위안이 될 것 같다.
남이 우리 집 정리를 해주다니… 아내가 이미 나를 잘 알고 벌인 일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버리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 마음속에 가진 욕망과 분노는 언제 어떻게 버리려나? 수많은 가지치기로 늘어난 분노를 일일이 버리려다 보니 모두 욕망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해진다. ‘버려야 사는’ 세상이 된 건 아닐 것이고 아마 그런 나이가 된 것이리라. 모두 머뭇거리던 탓이요, 결정할 ‘나의 몫'이다. 내 욕망이 아예 눈앞에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죽음의 그림자를 더 깊이 드리우기 전에, 우선 마음속의 절반이라도 스스로 죽여가야 한다. 유서를 쓰고 고치더라도 내친김에 신박하게 죽기로 결심하자.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던 버나드쇼가 눈앞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