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은 한 가지 색인줄 알다니 세상에 이런 멍청한... 컴퓨터 자판에서 글자색을 지정할 때 빨강 파랑의 칼라는 당연히 지정하여 색깔을 바꿀 줄도 안다. 검은색은 흰색과 마찬가지로 지정할 일이 없었다. 책을 읽다 졸면서도 '종이는 흰색이고 글자는 검은색'이니 흑백은 잘 알고 있지 않았더냐. 컴퓨터에서 텍스트를 입력하는데 바탕인 흰색과 검정으로 글이 보이므로 글자색 지정을 하고 키보드를 누르는 일은 없다. 흑백이 색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무슨 의미였던가? 컴퓨터는 색으로 인식하는 데 흑백은 색도 아니라고 여기는 비컴퓨터적인 내면의 마인드가 놀랍고 한심했다. 밤하늘 우주의 어둠도 무(無)인 공허일 뿐 색을 갖고 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칼라풀한 것만이 색으로 여겨졌나 보다.
교보문고 POD(Publish on Demand) 시스템에서 전자책을 발간하기까지 이메일로 소통하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기에 급급했다. 큰 딸이 제 딸 키워가며 바쁜 출장 중에도 신경을 써 준 덕으로 표지디자인은 완성되었다. 막내딸은 컴퓨팅의 소소한 트렌드에서 유용한 팁을 가르쳐주며 제 글을 다듬는 영감을 얻기도 했다. 사위는 교보문고의 시스템 이용방법과 출판담당자와 계약서의 작성등 자문에 힘이 되어주었다.
수필집으로 첫 책을 POD에 만들고 스스로 1권을 주문해 받아보았다. 내심 감격스러웠지만 본문의 서체가 마음에 안 든다. 가족에게 계면쩍게 책을 보여주고 아이들의 젊잖은 질타를 감수한다. 이건 아닌데... 서체는 투박하다 치더라도 군데군데 글씨가 진하고 흐리니 누가 보아도 책다운 책은 아니었다. 서체 지정이 잘못되었나 싶어 다시 1권을 주문해 보았는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두어 군데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나의 글을 옮기고 모으는 작업방식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만 여겼다. '복사 붙여 넣기'로 여러 가지 서체를 그대로 사용해 왔으니 어디선가 뒤엉킬 수 있다 싶었다. 구글 MS 한컴등 종종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어 달에 걸친 좌충우돌로 다음부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글만 쓰겠노라고 가족에게 미안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열흘쯤 바보처럼 기다리며 사는 일이 나쁘지는 않아 더 바보 같았다.
서체와 크기 등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친절하게 알려준 교보문고의 협력업체사장이 고마웠다. 책을 주문해서 확인하기 전에 먼저 컴퓨터에서 한 페이지를 출력해 보면 교정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물론 노트북이나 모바일 화면에서는 전혀 글자상태가 구분이 안되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멍청한 짓을 또 했었네 하면서도, 글자색 지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업체 간 호환성이 떨어진다는 소문에 문제 원인이 있으리라는 선입견 때문인가? 포기하고, 배포해야 할 시점이 촉박하므로 되는대로 인쇄를 주문하였다.
책을 서른 권도 넘게 출간한 선배에게 지나가듯 물어보니 나이 탓으로 난시 때문일 거라고 했다. 그럴 법도 했다. 얼마 전 시력검사 때 난시가 점점 더 심해진 것도 사실이므로 불가항력이라는 말로 들렸다. 그러나 시력에 문제없는 딸아이들도 책을 보고 실망하지 않았던가... 반신반의하는 중에 검은색이라도 진한 정도가 달라 지정해 주어야 한다고 바람에 지나가듯 들은 듯했다.
칼라와 흑백에 대한 이분법 사고가 문제였다. 검은색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검정이 얼마나 많겠는가. 흑색은 어둠처럼 캄캄하지만, 밤을 통과하려는 어스름한 어둠과 칠흑 같은 미드나잇을 지나 여명을 향한 어둠도 있었다. 버리지도 못하는 장롱 속 흰색셔츠는 하얀 정도가 모두 다르다. 누레지기도 하는 와이셔츠 색만큼 하얀색도 다양하다.
사인펜으로 수채화 그리기 수업에 참가 한 때가 떠올랐다. 수성 사인펜의 물 번짐을 이용하여 수채화 그림을 그린다. 36색 사인펜 중에서도 녹색의 다양한 빛깔은 계절을 느끼게 한다. 연두색은 풀잎 새싹을 떠 올린다. 초봄 나무에 물이 오르는 연두색으로부터 6.25 전쟁이 떠오르는 진초록의 여름 숲까지 초록색의 스펙트럼을 기억한다. 빨강 파랑 노랑 삼원색이라고 해도 스펙트럼은 넓다. 스펙트럼은 다양성을 보여준다. 퀴어의 깃발이 무지개색조인 것도 성 정체성의 다양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 고정관념은 이렇게 지독한 일이었구나.
이미 100부 인쇄 발주를 끝낸 상태이지만, 다시 PDF파일에서 글자색을 검정으로 지정하면 책은 한 가지 색의 검정으로 출간되리라는 확신이 섰다. 서둘러 업체에게 수정파일을 전달해 주어야겠다. 수정할 타이밍을 놓쳤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늦게나마 알게 된 안도의 기쁨이 크다. 배포된 책은 희귀본이 되어 그 자체가 훌륭한 사례로 남을 만한 뜻밖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마치 유명화가의 유작 스케치 이기라도 되는 듯, 허허로운 위로를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다. 엉터리처럼 놓치는 인생도 있는 법이니까...
송현공원 터에 전시되었던 비엔날레 건축물. 그새 철거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