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이라는 나이가 그다지 감흥을 일으키는 일은 아니다. 환갑나이라 해도 될 만큼 활동적으로 지내는 데, 별일 없어도 하루하루가 분주하다. 아내에게 "칠순? 안 어울림. 환갑도 인정할 수 없을 듯함. 돈이 아까워하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나름 '아재개그'로 축하하며, 결혼기념일 때마다 세금처럼 여겼던 불만을 슬쩍 토로한 것이다. 젊은 시절 어떤 때, 급기야 결혼기념일은 다투는 날이 된 적도 있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축하비용이 더 들고 돈의 행방도 묻지 못했다. 목돈을 고민하던 때 아내가 내민 돈의 정체를 알고부터는 모든 기념일에 대한 생각은 명쾌하게 정리되었다. 가정의 평화가 그렇게도 오는 거구나 싶었다. 한때 꽃다발로도 감동한 적이 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시큰둥하다. 딸만 둘인 집에서 여자의 속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중요한 일임을 경험을 통해 안다.
"친정 아빠가 엄마에게 잘해야 딸들도 남편에게 그대로 대우받는다는 걸 아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아내가 단톡방에 글을 적었다. 그 한마디에는 무게가 실려있었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빨리 알아차리게 했다. 여자 제갈공명이 납신 듯했다. 마침 오만 원권 지폐가 부족해 은행을 다녀와야 했고, 축의금과 부의금으로 준비해두어야 하는 외에도 부피가 작은 오만 원권 몇 장이 지갑 속에 있어야 든든하다. 아내에게 칠순 기념으로 현금을 전해준다고 해보았자,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기는 일에 불과한 데 기분이라도 좋게 해야 한다. 두 딸이 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잘 아는 터에 일찌감치 은행을 다녀오는 편이 낫다.
아내에게 전해줄 현금 외에 경조사비용으로도 쓸 돈도 인출한 후 '근거 없는 자신감'에 집으로 향한다. 은행에서 오만 원권을 내가 요구하는 대로 준 것도 오랜만의 일이다. 아파트입구에 이동식 시장이 섰는데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어! 밤을 깎아준다고...? 밤을 까는 기계와 함께 옥광밤이 눈에 띄었다. 토종밤보다 크고 날밤으로 먹으면 씹는 식감이 좋다. 마트 선반에 매끈하게 깎인 생밤은 왠지 사 먹기도 미안스럽고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생률로 먹는 밤 맛은 추억여행과도 같다. 과일 깎는 칼로 생밤을 깎는 손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날밤을 먹고는 싶지만, 싫은 게 밤 깎는 일이었다. 크기가 작은 토종밤은 깎는 정성에 비하면 별반 먹을 것도 없다. 밤은 껍데기가 두꺼워 칼을 찔러 넣기도 버거운데, 떫은 속 껍질도 벗겨내야만 "생률밤이로구나~"하는 노랫말을 흥얼거릴 수 있다. 한 봉지 밤을 깎아달라고 하면서 기계를 바라본다. 옥광밤이 통 안쪽의 플라스틱 사이로 끼워진 듯하더니 금세 속껍질까지 벗겨져 툭툭 튀어나온다. 기계는 잘도 깎아낸다.
옥광밤은 한 알 한 알이 우람해서 깐 밤, 군밤, 삶은 밤으로도 먹을만하다. 밤 껍데기는 단단하면서도 윤기가 흐른다. 광(光)이 나서 옥광밤이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아내의 70 성상도 옥(玉)처럼 귀중하다. 가족을 돌보고 건강하게 지내온 바탕에는 마치 밤을 하나씩 깎아내는 정성으로 살아온 듯했다. 거실 한편에서 절반은 졸면서도 하루의 마침기도를 하는 것을 볼 때 미안스러웠다. 우연히 고른 옥광밤이지만 아내의 칠순 선물로 그 의미를 더할 듯하니 그럴싸했다.
바람이 백목련 나무 꼭대기에만 불었는가? 바람도 없는데 얼마 안 되는 제 무게를 못 이겨 동시에 내려앉았다. 수십 장 흰 목련잎이 후드득 우박처럼 떨어졌다. 늦가을 낙엽처럼 꽃잎에도 떨켜가 있나 보다. 나뭇가지 끝 먼저 올라온 꽃잎부터 진다던가. 같은 날 태어난 흰 목련들이 보름도 안되어 수명을 다했다. 바닥에 내려앉은 꽃잎에서 고인이 된 동기생과 지인들이 떠올랐고 나는 '살아남은 자'임이 섬뜩했다.
떡이 한 상자 배달되었다. 직사각형의 각종 떡이 가지런한데 약과도 보였고 홍삼정과도 들어있다. 아내의 친구가 생일선물을 보냈다. 남편에게서 축하다운 축하를 기대할 게 없었는지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친구들끼리 축하를 주고받았고 나는 여느 때처럼 덤덤하다. 빨리 눈치챘어야 했다. 가족 단톡방에서 딸들과 오가는 말에서 아내의 칠순임을 상기했다. 5월 초 막내딸의 짧은 국내 휴가기간 중 굳이 예약했다던 제주 가족여행이 의아했었다. 만 나이로 바꾼다는 정부의 방침으로 내 칠순은 지난 듯 오지 않은 날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한 살 차이 우리의 칠순을 묶어 기념하려는 가족여행이었다.
부모님의 환갑과 칠순 팔순을 기념하던 때가 엊그제 일 같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칠순을 기막힌 나이로 여겼었다. 한 살 적은 아내가 칠순을 맞는 게 당연한데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내에게 "깐 옥광밤의 개수가 당신 나이야" 하고 농을 걸면서 내밀었다.
"70개?"
전혀 아니다. 대충 세어봐도 30여 개다. 아내가 젊게 살고 있다는 두 번째 '아재 개그'를 한 셈이었다. 옥광밤은 오프닝 쇼처럼 지나면서, 오만 원권을 내밀었는데 얼마인지는 안 묻고, 축하 편지라도 빨리 적어 가져오란다. 옥광밤 70알이라고 적힌 사진과 나의 축하 글이 인증숏이 되어 가족 단톡방에 올라왔다. 옥광밤을 헤아려 보지도 않은 줄 알지만 이미 개수는 중요하지 않다. 돌아오던 길에 흐드러진 목련이 자꾸 떠오르는 데 묻고 답할 일은 아니었다.
인증사진 행사는 끝났으므로 내가 경조금으로 쓸 만큼의 오만 원권은 되돌려주기만 기다린다. 일부 돌려받긴 하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처분권을 넘긴 5만 원권의 환급시기는 아내 몫이다. 아내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고, 엄마는 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많다. 남편 길들이기의 현장인 듯 묘한 칠순이지만 아내말에 순순히 따르게 된 적극 가담자는 바로 나다. 다른 별에서 살다 온 사위에게는 가끔씩 낯설게 해 미안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