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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만 Jan 25. 2024

발레마임과 Ballroom Dance

 발레는 남성들에게는 비교적 접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공연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농담처럼 '고급문화생활을 하는 군'하는 정도로 낯선 장르로 여겼다. 음악을 통한 정서, 바른 자세, 신체의 균형감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발레만 한 운동도 없다. 볼룸댄스를 배우면서 발레의 기본동작을 배우고 싶었다. 발레를 보면서 오리지널이 주는 매력을 알았지만 발레학원을 갈 수 없는 이유가 앞선다. 

 장년의 남자가 발레를 배워보겠다고? 하는 색안경으로 보는 시선이다. 또 다른 이유는 착 달라붙는 타이츠 무용복을 감당할 수 없어서다.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발레 의상인 '튀튀' 못지않게 남성 발레리노의 탄탄한 근육은 범접할 수 없다. 엉덩이 근육은 타고나야지 운동으로 만들어질 것 같지 않았다.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장의 발레강의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 조찬모임의 청중들은 쫑긋하며 듣는다. 발레 감상법으로 '발레 마임'을 꼽았다. 발레에도 소통의 언어가 있음을 공감했다. 마치 수화처럼 무용수들의 동작에 뜻이 들어있는데, '지젤'과 '백조의 호수'같은 줄거리가 있는 고전발레에서 발레 마임이 특히 중요하다. 말을 배우기 전 손녀와 할머니는 서로 발레마임을 이해했던 것 같다. 네 살 손녀는 발레학원에서 배운 동작을 할머니에게 자랑한다. 

 2008년 오프닝작으로 '지젤'을 공연한 유니버설발레단은 공연 전 발레 마임을 설명하고, 공연 중에는 마임 동작에 맞춰 자막을 제공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알프레드'가 '지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 '사랑한다'는 말 대신 두 손을 나란히 포개어 왼쪽 심장에 대고, '알프레드'가 '지젤'과 결혼할 것을 '맹세'하며 오른팔을 높이 들어 둘째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펴서 하늘을 가리키는 몇 가지 몸짓 언어만 이해해도 발레 감상이 훨씬 재밌다고 한다. 


 '나'는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하며, '당신'은 손을 벌려 상대를 향하게 한다. '기억하다'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만지며, '망각하다'는 양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하고 조용히 머리를 흔든다. '감사'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고마운 사람을 향해 한 손을 가슴에서부터 아래로 내리며, '간청'은 깍지 낀 두 손을 모아 애원하는 몸짓을 한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면 '입맞춤', 손등으로 얼굴 윤곽선을 따라 원을 그리며 살짝 쓰다듬으면 '아름답다'는 뜻. '슬픔'은 손가락으로 얼굴에 떨어진 눈물 자국을 따라 선을 긋고, '울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주먹을 쥐고 눈을 비빈다. '성냄'은 머리 위로 팔을 들고 팔꿈치를 앞으로 해 주먹을 떠는 시늉을 하고, '부정'은 손을 미는 몸짓으로 머리는 반대로 돌린다. 양손을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면 춤을 춘다는 뜻이며, 주먹을 몸 앞에서 교차시키는 건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발레 마임은 고전적인 이야기 전달 방식이다. 발레는 무용과 음악만으로 감동을 전한다. 한 청각 장애인 무용수는 음악을 듣지 못하지만, 발레 마임과 몸의 진동을 통해 음악과 리듬을 느낄 수 있었고, 관객들은 그녀의 독특한 표현 방식에 감동했다. 발레 무용수들은 수화를 배워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강화하고,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을 증진시키기도 한다. 

 발레마임으로 스토리와 무용을 잘 이해할 것 같다. 유구한 인류역사에 전해 내려온 감정의 표현은 불과 몇 개의 발레마임으로 충분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 내리기 이전부터 발레가 만들어졌기 때문인가? 지금도 발레는 비언어적 요소로 상상력을 키우고 무용의 표현에 전력투구한다. 언어와 문자, 말과 글이 생긴 뒤로 소통은 편리해졌지만 중요한 가치들이 뒤로 밀려난 듯하다. 

 볼룸댄스는 음악의 리듬을 타면서 비트의 완급(緩急)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춤이 발전했다. 볼룸댄스에서도 춤의 피겨를 연결한 안무로 정서를 표현한다. '용어 속에 동작 있다'라고 할 정도이니 피겨이름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말과 글이 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춤을 추는 동안에는 말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사람의 귀는 말에 집중하도록 길들여졌다. 말이 오가는 순간 춤은 엉망이 된다. 몸으로 대화하는 발레와 볼룸댄스는 상호 보완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아왔다. 

 언어가 사라진 세상이 그리워진다. 혹시라도 스마트폰이 사라지게 된다면, 말과 글이 필요 없을 세상이 되어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살이다. 너무 앞서나갔나 보다 싶지만 텔레파시라는 말이 생각나서 다소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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