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렉스턴(1932~)
24.12.3 계엄과 탄핵 논란으로 정치와 헌법의 해석에 관심이 높아졌다. TV뉴스만으로는 정치사상에 대한 부족한 식견 탓에 유튜브를 시청하느라 여념이 없다. 집회 군중의 시위에서 분노를 읽는데 집회가 길어질수록 논란이 커져감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절독한 뒤로 신문을 멀리하였던 일을 반성하며 도서관에서 일간신문들의 기사와 논조를 비교하게 되었다.
신문기사 뒤적이던 중 묘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보수가 사고 치면 전광훈에 손 벌려-그에 기대면 결국 정치적 파산” 개신교 극우 뉴라이트. 차별금지 동성애 대신 싸워주는 부흥사 출신 스피커. 이승만 시절의 이정재, 임화수 같은 존재다.
국민 저항권을 강조하니 나치에 저항하던 본 회퍼목사가 되라고도 한다.
특수부 검사출신 대통령이 선관위 사무처장에 친구 김용빈을 임명해 놓고도 부정선거라 주장한다...(20250201 한국일보 배덕만교수의 글에서)
신문의 좌우 편향성을 감안하더라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자극적인 제목을 뽑은 이유가 의아했다. 나의 평소 생각과는 매우 다른 곳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진영싸움이라는 것은 상식이 된 일인데 오늘날 나만 뒷북치는가도 싶었다. 여럿 일간신문의 논조도 살펴보며 비교하는 가운데 체제와 민주주의의 미래를 걱정하게 한다.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 속에, 현재 휴전상태인 지정학적 숙명 속에서, 인터넷과 SNS로 변화한 시대상속에서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른 신념을 갖추는 일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
나치와 무솔리니시대 역사의 유물로만 치부해 왔던 파시즘은 정확히 무엇일까? 미국 남부 kkk단으로부터 2차 대전 후에도 세계도처에 흔적을 남긴 파시즘이었다. 파시즘은 국가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도 궁금하다. 파시즘은 국가와 개인에게도 분노의 형태로 상존하고 있지 않을까? 권력의 속성상 갑과 을이라는 필연적인 경향을 띠는 모든 관계는 미래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형태를 드러낼 것 같다. 역사 속의 파시즘을 연구한 전문가의 책을 통해 불확실한 해답이라도 찾아보려 책의 주요 내용을 발췌 요약해 둔다. 이 책은 보수우파로부터 변절했다고 알려진 정규재 논설위원의 추천으로 알게 된 파시즘을 읽은 발췌문을 주로 적었다.
파시즘의 저자 로버트 렉스턴 1932년생.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권이 파시즘의 희생양으로만 인식되어 있는데 비해 광범위한 자발적 협력을 했음을 입증해 큰 충격을 던졌고, 20세기 최대의 주제인 파시즘을 생생한 현재적 문제로 조명하였다. 대중적 학술서임과 동시에 60여 년간 지속된 모든 파시즘 논쟁을 잠재울 결정적 저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파시즘
-무솔리니 이후 히틀러가 총통이 된 2달 뒤인 토마스 만의 1933.3.27 일기는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혁명을 목격했다'면서 '내재된 이념도 없이 다른 이념을 무조건 반대하며 고상하고 선량하고 점잖은 것을 모두 반대하고 또 자유와 진실 정의에 반대하는 혁명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저속한 인간쓰레기들이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동반해서 권력을 잡았다'고도 했다.
-만일 파시즘을 혁명적이라 한다면 사회질서를 뒤엎고 정치 사회 경제적 힘을 재분배하는 혁명의 의미가 아닌 다른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나치 인종 청소는 20세기 의학과 공중보건의 순결화 충동과 부적격자와 불결한 자들을 쓸어내버리려 한 우생학자 (인종개량학자)들의 열정, 완벽한 몸을 선망하는 육체의 미학 그리고 도덕이라는 잣대를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하는 과학적 합리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3년의 홀로코스트 유태인 대학살 전조임을 알았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조짐을 보이다.
-수정의 밤 사건 1938년 11월 9일 밤에서 10일 새벽에 걸쳐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이 급진적 나치당원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습격당한 사건이다. 산산조각 난 유리파편이 거리를 뒤덮여 수정처럼 빛났다고 해서 이렇게 불린다. 수백 채의 유대교 회당이 불타고 7,000개의 유대인 상점이 파괴되었으며 2만여 명 유대인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또 91명의 유대인이 즉결 처형당했다.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100% 거짓말보다 1%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낸다) 연설에 자극받고, 폴란드의 유대인 청년이 독일로 이민 간 부모가 추방당하자 이에 격분해 파리에서 독일 외교관을 살해한 사건은 이 습격에 좋은 빌미가 되었다. 독일에 살던 유대인에게 집단적으로 10억 마르크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했고 보상보험금을 몰수하여 소유물을 변상하는 데에 썼다. 개인적, 제도적 묵인의 결과였다. 1938년 3월에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9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서쪽 지방을 합병했다. 1939년 스페인 프랑코 장군이 내란에서 승리하고 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 사실 자유주의란 말이 파시즘에 비해 폐기 대상으로는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자유주의자를 좌파로 보지만 유럽인들은 자유주의자를 마거릿 대처, 로널드 레이건 같은 아무런 정부 간섭도 없는 방임주의적 자유시장 신봉자라고 보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그만큼 혼란스럽지는 않다
-파시즘의 일대기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1 파시즘의 탄생 2 정치 제도 안에 뿌리내리기 3 권력 장악 4 권력 행사 5 파시즘 정권이 급진화하거나 정상화하기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되는 장기 지속 기간.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출현. 제2의 고향인 군대에서 히틀러 상병은 애국심 가득한 자물쇠 제조공 안톤 드렉슬러가 창당한 곳을 조사하러 갔다가, 합류하여 555번 당원으로 지도위원 연설가로 활약하였고, 더 나아가 1920.2.24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 맥줏집에서 2000명이 출범하는 민족, 반유대, 백화점과 국제자본공격의 강령을 발표하며 창설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좌절 속에서 배급 병역 생산력 여론조작 인플레 자유보수공산주의분파 승전국 vs 패전국 분열로 파시즘이 뿌리내릴 환경이 조성되었다.
파시스트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 단합되고 자신감에 넘치는 지배 민족이 승리하길 기대했으며 분열되고 결단력 없는 잡종 민족들은 지배 민족의 몸종이 되기를 바랐다.
무솔리니의 큰 경쟁상대인 단눈치오였는데 베르사유조약으로 유고슬라비아영토가 된 1919년 9월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인 피우메로 진격해서 카르나로 공화국을 선포하고 로마식 경례를 하고 ‘에이아 a아 알라라’를 외쳤다. 이태리 북부 계곡의 검은 셔츠단 무솔리니가 이를 따라 하면서 57세 외눈박이 연극가 단눈치오에게는 가르다 호숫가에 성城을 내주었다. 파시스트식 경례는 브르주아 식 악수를 대체했고 로마식행진법으로, 무릎을 굽히지 않는 나치식과는 달랐다.
1851.12 나폴레옹 3세 대통령은 군사쿠데타로 황제나폴레옹 3세 등극 후 남성 전체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며, 빈자와 무식자에게 호소하는 슬로건을 이용했다. 1871 비스마르크도 파시즘 개척자로 볼 만하였다.
파시즘의 탄생은 미국 내전직후 남부 kkk단으로부터.
누군가 정당을 가리켜 버스와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탔다 내렸다 하기 때문이다. 많은 파시즘지도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주변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군중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분노를 부추기는 것 외에 어떤 분야에서도 전문적이지 못했다. 히틀러는 미술대학 낙방생이었고 무솔리니는 생업이 교사였지만 조급한 혁명가였다. 유제프 괴벨스는 문학적 야심이 있었지만 직장을 갖지 못했다. 헤르만 괴링은 정처 없이 떠돌던 1차 세계대전의 비행기 조종사였고 하인리히 힘러는 농업경제학을 공부한 학생이었지만 비료를 팔거나 닭을 기르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다. 살해 용의자인 아메리고 두미니, 우체국 직원 아들로 자라 히틀러의 최측근 비서관이 된 마르틴 보어만, 철학 교수 조반니 젠틀레, 토스카니니 같은 음악가. 이들을 하나로 결합한 것은 결국 사회적 지위가 아닌 가치관이었다.
파시즘 정당들이 써먹었던 고안물 하나는 동형기구 패러렐 스트럭처스였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외부의 정당은 정부 기관을 본뜬 조직을 만들었다. 독일 나치당에는 외교 정책 담당 기관이 따로 있었는데 당이 정권을 잡은 직후에는 기존의 외교 부서와 권력을 나누어야 했다. 그 우두머리였던 요하힘 폰 리벤트로프가 외무부 장관이 된 1938년 전문 외교관들을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파시즘의 성공의 필수적인 최후의 본질적 전제 조건은 파시스트 도전자들과 권력을 나눌 준비가 된 의사결정자들이었던 것이다.
제4장 권력 장악
6년 전 바이에른주정부지도자를 납치하려는 나치 쿠데타로 투옥되기도 한 히틀러는 두 번 다시 쿠데타는 안 하겠다고 결심한다. 자연스레 대공황의 기회로 선동가 히틀러는 회생하였다. 1932년 7월 독일 최대 정당이 된 나치당은 때마침 보수 세력에게 히틀러는 하늘이 내려준 존재와도 같았다. 좌파 세력을 배제한 채 과반수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힌덴부르크대통령은 1933년 1월 30일 히틀러-폰 파펜을 정부의 총리-부총리로 지명했다. 앨런 벌록의 표현처럼 상병출신 히틀러는 ‘골방의 음모’를 통해서 권좌로 ‘끌어올려졌다’.
1941.8 유대인 표지인 다윗의 별을 겉옷가슴에 큼지막하게 달고 다녀야 했고 제국에서 추방이 시작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1933.4 불매운동 1935.9 이민족 간 결혼금지는 시작일 뿐이고, 시민권박탈 1936 (베를린 올림픽 때는 세계의 이목이 있어 유대인박해는 다소 소강상태였다). 1938.11 수정의 밤을 거쳐 1939. 말 폴란드에서부터 '다윗의 별' 유대인 표지 달 것이 시행되었다.
홀로코스트의 첫 단계는 격리였고, 넘쳐나는 유대인을 내다 버릴 곳으로 폴란드 동부, 프랑스령의 마다가스카르, 러시아 정복지등이 거론되었다. 세계와 벌이는 전쟁으로 독일은 수세에 몰렸지만 파시즘의 기치는 소리를 높여가는 구조였다. 각 지역 지방행정관의 치안 물자 토지 보안문제로 유대인 거주지역 게토학살은 여성 아동을 포함해 공공연히 자행될 수 있었다. '쓸모없는 입'인 심신장애인 7만 명도 T-4 계획(베를린 티르가르텐 4번지) 아인자츠그루펜 처형활동의 일환이었다. 독가스와 살인주사등 예행연습도 마친 터이다. 독일군의 식량부족과 게토 내의 질병등의 문제발생, 조기 말살을 위한 총살집행은 처형자에게도 트라우마로 부작용이 컸던 바, 독가스 처형 방식으로 가스바겐 유개화차 30대와 약품 자이클론 B공장 학살을 위한 장소는 폴란드등 국경이 가까운 합병지에 6곳건설했다.
에티오피아도 이탈리아처럼 아파르트헤이트(1948 남아공의 앵글로보어인의 인종차별격리정책) 목적으로 파시즘이 동원되었다는 설. 남아공에서는 1990년 만델라 vs 보타 대통령 대타협 합의로 분리정책이 사라진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되었다.
1943 중립 아르헨티나의 프롤레타리아 페론대령이 노동복지장관을 자청하였다. 선동능력에 1945.10 에바까지 체포하자 파업노동자 '웃통 벗은 사람들 (데스카미사도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위로 독재정권이 구성되었다. 33세 에비타 암사망 聖女인식
대공황으로 일본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아 1931 농촌 가난으로 만주침략의 계기가 되었다. 고노에 후이마로 총리와 도조 히데키육군상이 군국주의 열었다.
스탈린은 보편적 평등을 목적으로 계급의 적을 대상으로 했고, 히틀러는 인종의 적을 목표로 지배인종의 패권을 추구했다. 민주주의성립 이후 그 실패에서 나타난 대중을 열광 선동시키는 현상으로 권위주의체제가 파시즘을 채택할 때 권력의 실체가 된다.
파시즘의 정의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파시즘이 뿌리를 내리려면 반드시 그 나라의 수도에서 극적인 행진을 벌알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국민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차원에서 국가의 적에 대한 불법적 처사를 용인한다는 결정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파시즘이 세력을 불려 나갈 때 적절하게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과거 파시즘이 성공을 거두었던 과정을 이해한다면 제때 현명하게 대처할 가능성도 훨씬 커질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교수의 첨언
한국에서 보수 우파와 파시즘 세력 간의 결합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대 변화를 두려워한 보수 엘리트들의 비겁함과 좌파를 막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는 거꾸로 된 사고방식이 파시즘을 초래했다는 진단은 우리 사회에서도 진지하게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파시즘적 경향성도 중요하다는 가정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보수 우파의 그늘에 기생하면서 여러 경로로 일정한 영향력과 거부권을 행사하는 제한적 파시즘의 존재 그리고 그들과 결별하지 못하는 보수 우파에 대해 보수주의 스스로가 냉정한 자기 성찰을 해 볼 일이다. 로저 그리핀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얘기한 바 있다. 모든 파시즘은 필연적으로 패배한다. 국가 갱생과 부흥이라는 협소한 진리의 체계로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민족 전체를 침몰시킨 히틀러 파시즘은 전쟁과 끝이 없는 파괴를 향한 폭주열차라는 교훈을 남겼다.
< 원하는 것만 보는 세상 >
사람은 자신이 준비된 만큼만 세상을 본다(People only SEE what they are PREPARED to see). 눈 앞에 많은 것들이 펼쳐져 있어도, 내가 관심을 두고 찾아보려는 대상만 눈에 든다.
옷을 사려는 날이면 사방이 온통 옷 가게 천지가 되고, 헤어스타일을 의식하는 날에는 모든 사람의 헤어스타일만 크게 보이게 된다. 그날그날 내 마음속 관심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대상도, 마음이 반응하는 사물도 달라진다.
그러나 한편으론 매일 지나다니면서도 전혀 알지 못한 가게가 있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 “근처에 문방구점이 어디 있냐?”고 물어볼 때야 “아, 그러고 보니 회사 뒤에 문방구점이 있었나?” 하며 놀라곤 한다. 여러 번을 지나쳤을 텐데 마음 속에 전혀 기억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관심이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단편소설 속 여인이 잃어버린 가짜 목걸이를 진품이라고 알고는 평생을 빚에 허덕이며 갚으려 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가 중요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산업시찰단을 파견할 때는 한번에 모든 정보를 획득하여야 하므로 특정 분야를 전공으로 한 사람으로 구성하드라도 기획부터, 연구개발, 제품설계, 제조, 시험 평가, 구매, 종합군수지원 등 기술적으로 다른 분야의 경험 인력을 동시에 구성하여 파견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경험의 눈으로만 판단하는 한계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바쁜 일상으로 인하여 모든 정보를 다 읽고 보고 느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취득하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나름 선호하는 획득 수단을 통하여 꾸준히 취득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한쪽으로 기울어진 마음으로 편 가르기에 채색된 정보로 무장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라지고 같은 진영 속에서조차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이 되어 편 가르기 싸움을 하고 있다. 내가 속하는 편만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합리적 중도 중용 세력들이 배신자로 몰리는 현상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비효율성이 나라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주고 있는 상태이다. 패거리 싸움만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편, 세상 모든 것을 모두 다 제대로 보고,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 뇌가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정보의 홍수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대뇌는 들어오는 정보 중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만 추려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걸러낼 것이다. 그리고 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관심사나 감정 상태, 즉 대뇌가 어떤 마음 상태에 맞춰져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예컨대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할 때는 출근길의 일상 풍경조차 눈부시게 보인다. 평소와 똑같은 거리, 똑같은 건물, 똑같은 사람들인데 유난히 밝고 활기차게 느껴져 저절로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게 된다. 반면 마음이 울적할 때는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를 봐도 시들고 흑백으로만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 세상이 본질적으로 어렵기만 한 것도, 쉬운 것도 아니다. 보는 시선에 따라 달라질 뿐이며, 어느 쪽을 더 크게 인식하느냐는 내 선택이자 책임이다. 마치 반 컵의 물을 보고 “이제 절반밖에 남지 않았어”고 슬퍼할 수도, “아직 절반이나 남았군”이라고 기뻐할 수도 있는 것처럼, 각자의 관점이 결국 현실을 결정한다.
결국 세상은 “내가 보는 것만이 존재하고, 또 보는 대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슬픔에만 머무를 수도, 혹은 기쁨과 아름다움을 조금 더 찾아볼 수도 있다. 언제나 반은 차 있고, 반은 비어 있는 물컵처럼, 세상 역시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을 동시에 품고 있다.
내 마음이 보는 대로, 세상은 그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 뿐이다. 결국 “세상은 보는 대로 존재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것, 그것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열쇠가 된다. 오늘 하루 무엇에 주파수를 맞출지, 무엇에 내 시선을 고정할지, 결국 그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정보 홍수 시대에 정보 획득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하면서도 내 마음 상태로 인해 정보 편식이 되지 않도록 다양하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장시간 동안 우리끼리, 끼리끼리 등 어느 한 쪽에만 고착화된 정보 편식이 객관적, 합리적 판단에는 위험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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