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향

헨리 나우웬 신부

by 이용만

- 나우웬 사제의 고백 -

렘브란트를 회고하는 책을 통한 여정의 중심에는 17세기에 완성된 그림 한 폭과 그 화가, 1세기에 나온 우화 한 편과 그 지은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20세기의 한 인간이 있습니다. 사실 나야말로 기나긴 떠돌이 생활에 완전히 탈진한 아들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지난날의 내 모습인 동시에 장래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 완전 두려움 없는 완벽한 안정감, 영원토록 변함없는 집 등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마음에 다가서는 통로가 열린 겁니다. 강의실에서만 20여 년을 보냈으니 이제 하나님이 ‘심령이 가난한 이들’을 대단히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하시며, 내 편에서 줄 건 거의 없을지라도 그쪽에서 베풀어 준 선물은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할 때가 된 겁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방관자 또는 관찰자들이 있습니다. 살아온 여정을 되짚어볼수록 나 역시 참으로 긴 세월에 걸쳐 구경꾼 노릇을 해 왔다는 것을 뚜렷이 알 수 있었습니다. 내부인이 되어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외부인의 자리를 선택하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그처럼 외부에서 안쪽을 넘겨 보는 눈길에는 때로는 호기심이, 때로는 시샘이, 때로는 근심이, 경우에 따라서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랑 용서 치유를 베푸는 것보다 그걸 받아들이기가 한결 힘들다는 사실과 맞닥뜨리는 자리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장 23절)." 내가 바로 하나님의 집이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곧 작은아들이라고 철석같이 믿게 만들던 그 절박한 감정들이 의식 뒤편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친구는 ‘글쎄, 자넨 도리어 큰아들과 더 닮지 않았나 싶은데…’ 그의 한마디는 내면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우리 집 맏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비롯해 그동안 얼마나 착실하게 본분을 다하며 살았는지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마치 둘째 아들인 것처럼 살았던 겁니다.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질투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묘한 독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불평을 입에 달고 지냈는지 얼마나 적대감에 찌든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그처럼 오래도록 자신을 작은 아들로 여길 수 있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나는 분명히 큰아들이었지만 동생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평생 집을 떠나지 않았을지라도 길을 잃고 방황하기는 매 한 가지였습니다.


사제서품 30년 고뇌 중에 외딴 은신처까지 찾아온 수 모스텔러 할머니는 렘브란트의 그림 이야기를 듣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작은 아들이라고 생각하든 큰아들로 여기든, 아버지처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얘기를 듣는 순간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림과 더불어 산 세월이 이미 몇 해고 아들을 부둥켜안은 노인의 모습을 지켜본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그 아버지가 평생 감당해야 할 소명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표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순세 살, 세상을 떠나는 렘브란트는 기꺼이 자신을 아버지의 자리에 두었습니다. “평생 친구를 찾더군요. 사방팔방 관심과 인정, 지지를 구걸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진짜 소명을 추구할 때가 됐습니다.” 비로소 영적으로 나 자신을 아버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바로 작은아들이었고 큰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주님의 자녀뿐만 아니라 ‘안타깝고 불쌍해서 마음이 끓는 부모’ 곧 하나님의 모습을 찾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1부 작은아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앗다”(눅 10장 23절) 시므온과 아기 예수.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는 둘 다 심중에 신비한 빛을 품고 있으며 거기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누가복음에서 유산분할과 처분권까지 요구한 작은아들의 ‘먼 지방 가출’은 배신과 단절이라고 하면서 나우웬 신부는 '영적가출'에 주목한다.

두 개의 탕자의 귀향 중 1636년 동판화는 동적인 데 비해 32년 뒤 1668년 유화는 정적이다. 크리스티안 튐펠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적인 구조 속에서 포용과 용서의 순간은 끝없이 지속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움직임은 쉬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무언가를 시사한다'라고. 렘브란트는 1635년 아들을 잃고 3년 후 장녀를 1640년에는 둘째 딸을 1642년에는 사스키아를 보내야 했다. 1663 핸드리키예를, 5년 후 아들을 잃고 이듬해인 1669년 죽었다.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 전달하려는 참 뜻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권세를 가진 거룩한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나는 어느덧 ‘사랑하는 아이야’라고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단 한 곳,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등졌으며 다른 곳에 가면 집에 없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여기저기를 필사적으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청력이 생긴 순간부터 잡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별 볼일 없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관심을 거두는 게 인지상정이야. 쓸모없어지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 자체로는 별 해가 없는 제안들이 삶을 지배해서 ‘먼 지방’으로 끌어내기 시작합니다 그 시점을 짚어내기가 특별히 어려운 건 아닙니다. 분노 원한 질투 앙갚음 하고 싶은 욕구 욕정 탐욕 적개심 경쟁의식 등은 집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명확한 증표입니다. 이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이처럼 어두운 정서와 열정, 느낌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순간이 거의 없다는 기막힌 현실에 맞닥뜨리게 될 겁니다. 문제의 핵심은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한다면 사랑하고말고 라는)?” 조건뿐인 속임수의 세상을 섬기느라 코가 꿴 채 순환고리는 중독이 되고 고독이 되어버립니다.

“… 나는 더 이상 아버지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 용서는 ‘한마디로 복수를 포기하고 얼마쯤 자비를 베풀려는 상대편의 의지를 가리킨다’는 인생 경험을 더 신뢰합니다. 뉘우치는 마음이 있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에 기대는 회개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도를 찾으려는 자기중심적인 고백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은데 이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세상에 증명해 보라는 사탄의 시험까지 물리친 뒤에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산상수훈.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예수님이 닦아 놓으신 길 말고는 하나님께로 갈 방도가 없습니다.

“이건 자궁에서 막 나온 갓난아이의 머리예요 보세요 아직 젖어 있어요 얼굴에도 여전히 태아의 느낌이 남아 있잖아요” 피에르 마리 수사는 아주 시적이고 성경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탕자에 빗대어 조명합니다. 천국에서 가출한 예수가 먼 지방(=인간 세상)에 이르러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부르짖으며 절망이 바닥까지 내려가신 뒤에 죽음의 중심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 “ 자 이제 나는 내 아버지이자 그대들의 아버지, 내 하나님이자 그대들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탕자의 귀향은 곧 모든 이들을 이끌어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 아들의 귀향이 되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저 감동적인 비유를 화폭에 옮긴 삽화가 아니라 구원 역사의 압축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는 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보여 줍니다.


제2부 큰아들


큰 아들이 집을 나가다? 음악이 연주되고 춤추는 소리는. 하인이 전하는 작은 아들의 귀향은 희소식이기는커녕 위축과 분노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환한 빛이 흘러넘치는 아버지의 포옹은 하나님의 집이요 음악과 춤이 그 안에 다 있습니다. 큰아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기꺼이 죄인들과 한 상에 앉으려 했을까요? 저마다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차가운 분노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비하면 정욕에 눈이 멀어 버린 일탈 행위에서 돌이키는 건 훨씬 쉬운 일입니다. 이건 훨씬 치명적입니다. 개인적인 장점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좋은 자질만 가지고 있는데 원망과 불평이 바로 그 칭찬할 만한 태도들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니 정말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 탓에 절망감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 안의 큰아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치료는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복이 있다.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누가복음 6장 20~21." 테크논(내 아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에 대해 큰 아들은 동생을 가리키며 "이 아들에게는…"이라고 말할 정도로 분노를 표현합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자기 집에서 큰 아들은 이방인의 신세가 된 겁니다. 진정한 자유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귀향이라는 영적인 사건을 돌아볼 때마다 하늘 아버지께 의지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3부 아버지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마태 20:1-16)로 상처와 질투를 만들다니 고지식한 하나님은 비교를 모른다(얘야, 너는 늘…) 동료 형제 자매를 질투 자해 원망합니다. 신앙의 신비란 주님 편에서 나를 지목하고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그 눈을 피해 다니는 동안에도 나를 만나러 두루 살피고 다니는 분으로 여긴다면 내 영적인 여정이 극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이 반드시 찾아야 할 만큼 소중한 존재로 믿고 있나요? 오랫동안 낮은 자존감을 일종의 미덕으로 착각했습니다. 교만과 독단을 경계하는 말을 하도 자주 들어서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주님이 베풀어 주신 최고의 사랑을 부정하고 저마다 가지고 태어난 우수한 자질을 무시하는 행위야 말로 실질적인 죄라는 것을 지금은 잘 압니다.


아버지, 잔치를 열다


맨발은 가난 더 나아가 종속의 상징입니다.신발은 쫓기는 처지에서 벗어나 쫓는 입장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신발을 신는다네. 하늘나라에 가면 나도 신발을 신을 거야. 하나님 나라를 마음껏 돌아다녀야지(흑인 영가)


스가랴 선지자의 네 번째 환상(겉옷 머리관 반지 신발 일곱 눈을 가진 돌(이 땅의 죄를 하루 만에 없애겠다는 글이 새겨진)에도 등장하는 신발입니다. 서로 이웃을 초대하고 잔치를 엽니다(새로운 나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가지셨던 최후의 만찬(소묘)


수없이 많은 거절과 고난 상처가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만 그 아픔 속에서도 일단 기쁨을 찾는 길을 선택하면 삶은 곧 잔치가 됩니다. 슬픔을 모두 없애 주시지는 않을지라도 <병자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1649년 소묘> 예수님은 세상에 원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대단히 현실적인 시각을 보이셨습니다. 전쟁과 소동 지진 역병과 기근 박해와 배신 미움과 모함 등을 일일이 거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탕자의 귀향을 처음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잘못을 뉘우치는 아들이 된다는 건, 반갑게 맞는 아버지가 되는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의식적으로 어린아이의 단계를 뛰어넘어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는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영적인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정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용납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는 한 걸까요? 아버지가 되는 두려운 과업을 회피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지는 않았나요?


아버지가 된다는 것(맺는말)


세상에 속한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귀속된 신분으로 돌아서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일생일대의 대변환입니다. 슬퍼하는 것이 가엾게 여기는 방법이라니.. 슬픔은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초월이야말로 용서에 꼭 필요한 훈련입니다. 너그러워야 합니다. 제너러시티는 gen(같은 유형의 존재)을 어원으로 합니다. 너그러움은 신뢰할 만한 가족을 창출해 냅니다.

아버지로서는 인간이 마음으로 소망하는 모든 것이 집에 다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호기심에 빠져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려는 욕구라든지 어린 시절에 놓쳐 버렸다고 생각하는 기회를 다시 잡으려는 욕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청춘은 흘러갔으며 여전히 어린아이의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스스로 노쇠했고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는 진실을 덮으려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아버지가 되는 데는 두려울 만큼 비어 있는 공간이 존재합니다. 거기엔 권력도 성공도 인기도 쉽게 얻는 만족도 없습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비운 그 여백은 곧 진정한 자유가 깃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곳이며 사랑이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 지점이자 참다운 영적인 능력을 찾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안의 두 아들, 거역하는 작은 아들과 원망 가득한 큰아들, 모두를 불러올려 하늘 아버지가 내게 베푸신 조건 없이 용서하는 사랑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내 아버지가 집에 머무시는 것처럼 집을 벗어나지 말라고 요구하시는 그 거룩한 부르심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 안의 두 아들은 점차 인정이 넘치는 아버지로 변해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불안한 마음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소망을 충족시켜 줍니다.


에필로그-- 몸으로 그림을 살다


진정한 귀향이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심령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간다는 뜻임을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지적장애 공동체를 방문했다가 렘브란트의 그림과 대면하면서 구원의 신비에 깊이 뿌리내린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가난한 이들이 베풀어 준 축복 사이를 연결 지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아버지로서 느끼는 환희는 빗나간 자식들이 맛보는 기쁨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것은 거부와 외로움을 뛰어넘는 희열입니다. 인정과 소속감마저 초월한 기쁨입니다.

참으로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려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굶주린 가난한 마음을 공유해야 합니다. 렘브란트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 아들에게서 구부정하게서 있는 아버지에게로,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인도했습니다. 나이 들어 쭈글쭈글해진 내 두 손은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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