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두고 읽는 니체

by 사이토 다카시

by 이용만


사이토 다카시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했고 메이지 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1년 <신체 감각을 되찾는다>로 신초학예상을 받았다. 저서로 <잡담이 능력이다>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질문의 힘>등이 있다.

https://youtu.be/o-lzzuEVSMY?si=kI6cTRiQBTTkaO_9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아포리즘(격언, 경구)을 특징으로 하는 사상가다. horizon에 분리접두사 apo가 붙은 aphorism은 글자 그대로 '수평선 너머 떠오르는 태양빛'처럼 핵심과 본질을 함축한 촌철살인의 지문들이다. 니체 사상은 독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히고 편견과 고정관념을 단번에 흔들어 깨워 새로운 관점으로 이끈다.

니체는 1872년 <비극의 탄생>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80년 <방랑자와 그 그림자> 1881년 <아침놀> 82년 <즐거운 학문> 1883년~1885년 4부에 걸쳐 출판된 철학적 서사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86년 <선악의 저편> 87년 <도덕의 계보학> 88년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이 사람을 보라>등을 저술하였다.


파트 1 한 발의 화살이 되어라

챕터 1 내일을 향한 화살

니체의 '초인을 향해 날아가는 한 발의 화살'이라는 표현을 변용하여 '동경하는 것을 향한 화살이 되어라'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고전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전한(前漢)의 장수 이광은 궁술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젊었을 때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의 호랑이가 자고 있는 걸 보았다. 이에 이광이 전력을 다해 화살을 당겨 명중시켰는데 이상하게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호랑이 모양의 바위로 놀랍게도 바위 한가운데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사석성호 또는 중석몰촉이라는 고사성어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의 정신일도 하사불성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자기 미래의 꿈에 계속 또 다른 꿈을 더해 나가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현재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거나 소소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다음에 이어질지 모를 장벽을 걱정하며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니체가 말한 한 발의 화살 이미지는 방향과 양을 가진 벡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벡터란 크기만의 변량을 가진 스칼라와는 달리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가진 물리량이다. 속도 변위 가속도 힘 운동량 전기장 등을 표기할 때 이것을 사용한다. 벡터는 화살표의 길이로 크기를 화살표 방향으로 방향을 나타낸다. 니체 스스로 초인이라는 존재를 향해 날아가는 하나의 큰 벡터였던 것이다. 동경의 화살은 이미 자신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챕터 2 자화자찬의 힘

니체는 1888년에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책으로 인류에게 최대의 선물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책은 니체의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오랜 세월 공들여 쓴 자기 작품을 변변치 않다며 겸양을 떠는 모습이 때로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으로 들릴 때가 있다. 타인에게 공격받기 싫어서 혹은 나중에 있을지 모르는 주변의 실망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을 실제보다 한참 낮춰 버리는 것이다. 자기 방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대담하게 자신을 믿는 것이 좋다. 그대들 자신과 마음을 믿는 것이 좋다. 자신을 믿지 않는 자의 말은 언제나 거짓이 된다.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잘 만들어졌는가가 우선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객관성이 중요하다. 청년들도 니체처럼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자기 능력을 신뢰하며 굳게 믿어야 한다. <이 사람을 보라>의 목차를 보면 누구나 말문이 막힐 것이다. 서문에 이어 다음과 같은 제목의 장이 열거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지혜로운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가?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깎아내리지 마라. 그런 태도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꽁꽁 옭아매게 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을 항상 존귀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존경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결코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누구로부터 지탄받을 일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런 태도가 미래를 꿈꾸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라.

챕터 3 분노의 불꽃으로부터 도망쳐라

질투로 인해 맹수가 되어 버린 사내

프랑스어로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말이 있다.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반복되어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상태를 말하는 이 단어는 현대인들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는 막연한 분노 또는 질투를 의미한다. 나는 예전에 벤츠 자동차나 호화 전원주택 같이 일반인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 질투세란 이름의 위자료라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20대를 너무도 궁핍하게 보낸 나한테는 그런 감정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가진 자들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 때문에 막연한 분노가 있었던 것이다. 이유 없는 반항, 부유세 등이 생각난다. 나카지마 아쓰시의 산월기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이 글은 분노로 인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내의 고백을 통해 막연한 분노나 질투심이 인간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깨닫게 한다. 중국 당나라 현종 때 어려서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은 이징은 진사 시험에 급제하면서 입신출세의 꿈에 부풀지만 변변찮은 직분과 녹봉에 좌절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어릴 적부터 꿈꿔온 대로 만천하에 명성을 드높이며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려면 명망 있는 시인이 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관직을 떨치고 나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맞닥뜨린 현실은 찢어지게 가난한 일상이었다. 시인으로서 전혀 꽃 피우지 못하는 자신의 재능에 실망하면서도 어떻게든 뭔가를 이뤄보려 발버둥 치는 그를 세상은 너무도 가혹하게 절벽 끝으로 몰아세웠다. 이징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어쩔 수 없이 미관 말직으로 복직했는데 더 비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형편없는 인간이라며 무시했던 자들이 그보다 훨씬 높은 직위에 올라 떵떵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할수록 그런 능력과는 별개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들에게 질투를 느낄수록 그의 삶은 나락으로 치다를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어느 날 미친 듯이 울부짖다가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원참이라는 사람이 승진하여 영남 지방의 임지로 가기 위해 어느 산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다. 산속을 지나가는 도중에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그를 덮치려 했는데 가만히 보니 그것은 1년 전에 사라진 이징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던 친구 사이였다. 원참이 이징에게 어떻게 호랑이가 되었는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어느 날 밤 밖에서 나가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정신없이 뛰어 나갔다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어느 개울가에 당도 했는데 강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온몸이 털로 뒤덮인 호랑이로 변해 있었다. 내가 짐승으로 변하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당장 죽을 결심을 했지만 토끼 한 마리를 본 순간 그 생각은 잊어버렸고 잠시 후 내 입은 이미 토끼의 피로 푹 젖어 있었다네. 그 뒤로 하루에 얼마 동안은 인간으로 돌아와 예전에 읽었던 책의 구조를 떠올리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네. 그리하여 얼마 전까지는 내가 왜 호랑이가 되었는지를 탄식했는데 이제는 내가 어찌해서 예전에 인간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두렵고 비통한 일인가. 이징은 높은 벼슬에 올라 임지로 향하는 옛 친구의 얼굴을 부러운듯이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시로서 명성을 얻고자 했으면서도 스승을 찾지 않았고 성공을 바라면서도 벗들과 더불어 공부해 온몸을 던지지도 않았네.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그 잘난 자존심이 바로 맹수였던 것일세. 분노나 질투에 휘둘리게 되면 좋은 점들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거나 긍정적인 것에도 눈을 감아 버리는 습성이 생겨 종국에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병들게 하는 르상티망의 싹을 어떻게 잘라내느냐. 바로 거기서 니체가 말하는 초인으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보통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삶을 더욱 견고하게 지탱하게 해주는 에너지가 있다. 열등감도 그중 하나다. 부족이나 결핍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강하게 살아남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열등감에서 비롯된 에너지는 다루기가 무척이나 힘들다는 점에서 핵 원료와 비슷하다. 데미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건 우리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것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 속에 없는 것들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 이런 말이 있다. 똑같은 것을 대해도 어떤 사람은 거기서 많은 것을 깨닫고 얻어내지만 어떤 사람은 한두 가지밖에 얻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를 능력 차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자기 안에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풍요롭게 해 줄 대상을 찾지 말고 나 스스로가 풍요로운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자 풍요로운 인생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챕터 4 자기 삶에 박수를 쳐라

나를 위해 박수를 친다는 것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는 기술로서 박수가 최고이다. 첫째 분위기를 띄운다. 둘째 박수받는 쪽이 기분이 좋아진다. 셋째 박수를 치면 분노나 질투의 진흙탕에서 탈출할 수 있다. 당신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에서 탈피했기 때문에 그만큼 초인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니체는 575개의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는 <아침놀>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면 자기 자신까지 기쁨이 넘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양손에 그리고 가슴에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만약 산월기 속의 이징이 박수의 기술을 알고 자신이 먼저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더라면 자기 삶에 박수를 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산골짜기로 들어가 배고픔에 시달리는 맹수가 되는 비극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니체는 아침놀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항상 성실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습성을 갖고 있으며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랑을 사랑으로 느낄 수 없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정확히 아는 것부터 시작하라. 자신조차 모르면서 상대를 알지는 불가능한 일이다.

챕터 5 들판의 무소처럼 혼자 살아라

스리랑카 출신 승려 월폴라 라훌라의 책<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에 이런 글이 있다. 우리는 친구를 얻는 행복을 칭송한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우수한 혹은 동등한 친구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붓다도 이런 말에 동의했지만 만약 그런 친구를 얻을 수 없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 살라고 말했다. 무소의 뿔은 최초로 성립된 불경인 수타니파타에 나오는 말로 무소는 코뿔소를 뜻한다. 코뿔소는 원래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습성이 있다. 이처럼 깨달음의 길은 혼자서 가는 길이기에 무소의 뿔이 한 곳을 향하듯이 혼자 살라는 충고이다. 놀라운 일은 붓다의 말에서 니체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살라는 말은 독립된 인간이 되라는 뜻인데 이는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행동에 끝까지 책임지는 인간이 되려고 했던 니체의 말과 동어반복처럼 들린다. 19세기 후반을 지독하리만치 공격적인 발언으로 일관했던 니체가 온화하고 관용적인 이미지의 붓다와 의미가 통하니 무척이나 흥미롭다.

니체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의 친구 로데에게 보낸 편지에는 "진실한 우정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네. 실제로 진실한 우정은 자기 인생행로가 황야를 지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피곤한 유랑자 같이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아주 엄선된 대접이지"라고 썼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에서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모습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함께 침묵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감동하며 울고 웃으면서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도 멋진 일이다.

챕터 6 더 크게 기뻐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작은 일에도 최대한 기뻐하라. 기뻐하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잡념을 잊을 수 있고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나 증오심도 옅어진다. 부끄러워하거나 참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싱글벙글 웃어라. 교육 현장에서 왕따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도망칠 수 있는 듯하면서도 끝내 도망칠 수 없는,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지만 끝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왕따 소녀의 모습을 그린 아마미야 가린의 <친구 벌>이라는 소설은 왕따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왕따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다. 상대가 고통으로 일그러질수록 더 큰 희열을 느끼며 다음 공격 기회를 엿본다. 지금부터 더 좋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항상 심을 품으면 주위 사람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히게 되고 상대가 지겨워지면 대상을 바꿔가면서 따돌리는 것이 가해 학생의 습성이다.

챕터 7 향상심이 없으면 죽은 인간이다

섣부른 평등주의가 빚은 커다란 오류

니체가 살았던 19세기는 자유 평등 사랑이라는 슬로건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던 시대였다. 문제는 평등이라는 개념에 있다. 평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냉철하게 평가해야 할 것들조차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니체는 사이비 평등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대형 독거미인 타란툴라가 같은 존재라고 불렀다. 높은 가치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끌어내리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니체는 이런 일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르상티망 즉 막연한 분노나 질투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그런 사람들을 기피했다. 타란툴라들이 말하는 아래로의 평등은 개인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특별함을 말살하는 살인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영어권 나라에서 살다 온 학생들은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발음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어린이들 사이에서 왕따의 대상이 된다는 교사들의 증언이다. 하향 평준화 경향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에서 우수한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리려거나 해서 무리하게 평등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인간을 진보하게 한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평등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욕망을 갖고 있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욕망을 갖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누군가 평등을 부르짖을 때는 그가 말하는 게 어느 쪽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 고고로>의 등장인물인 선생이 친구인 k를 자살하도록 몰아세울 때도 향상심이라는 말이 크게 작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코이시카와라는 소도시에서 어느 군인의 유가족 집에서 하숙을 하던 선생은 그 집 아주머니와 딸을 허물없이 대하고 있었다. 이제는 주인아주머니도 딸과 그의 결혼을 바라는 것 같았고 선생도 그게 그다지 싫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망설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친구 K도 그 집에 함께 하숙을 하도록 주선한다. 그런데 얼마 뒤 K가 그에게 그 집의 딸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자, 그는 하숙집 딸과 자신 사이에 끼어든 k의 돌출 행동에 크게 동요한다. 화가 난 선생은 K에게 이렇게 두 번이나 쏘아붙인다. 너처럼 정신적으로 향상되려는 마음이 없는 놈은 바보다. 이 말에 나약한 심성의 K는 그래 난 정말 바보다라고 대답하며 물러선다. 선생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인 아주머니를 찾아가 당장 딸을 달라며 청혼했고 결혼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K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그 뒤 좋아하는 여자의 결혼 소식을 들은 K는 자살해 버린다. <마음>이 출간한 때는 1914년으로 이때는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세계로 내달리던 시대였기 때문에 향상심이라는 말이 오늘날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청년들에게 자극을 주던 때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희망과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람이기를, 그대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는 영웅을 절대 버리지 않기를, 그대가 희망하는 삶의 최고봉을 계속 성스러운 곳으로 여기며 똑바로 응시하기를 바란다. '향상심이 없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니체는 말한다. 부질없는 르상티망에 희망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존경하는 것을 향해 계속 희망의 화살을 쏘아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챕터 8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피하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인가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다리로 높은 곳을 향해 걸으면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은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만드는 고통이다. 일본의 어느 여자 가수가 여자는 나이가 들면 양수가 썩는다라고 말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그 가수의 발언이 나이 든 여성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집단적인 관음증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의 스캔들을 흥미진진하게 보며 키득거리는 현대 일부 현대인들을 보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니체가 말했던 '작은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어진다. 질투심이나 분노 복수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수치스러워하기는커녕 그것이 자기 의견을 마음껏 발산하는 자유라며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는 세상이다.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 물들어 버린 것일까? 니체는 <아침놀>에서 고독의 가치를 설명하며 이렇게 썼다. 살면서 때로는 멀리 보는 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친한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생각하면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그립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처럼 어떤 대상과 얼마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고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자기를 상대해 줄 친구를 찾고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왜 고독할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기쁨을 나누는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고독으로 인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근육이 단단한 사람은 작은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혼자 있어도 외로움에 떠밀려 다니지 않는다. 그러니 삶이 고달프다면 마음껏 고독의 심연으로 도피하라. 영국 정신분석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앤서니 스토어 박사는 <고독의 위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고 있지만 사실 인간관계와 행복의 연결 고리는 매우 허약하다. 니체는 평생을 고독하게 살았지만 진짜 행복은 자기 속에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평생을 일관했기에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파트 2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챕터 1 지금이야말로 분발할 때다. 우연은 없다 오직 필연뿐. 니체에게 현재라는 시간은 문門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문의 안과 밖은 과거와 미래의 길로 연결된다 문의 안쪽은 현재이지만 그것을 열고 나가는 순간 안쪽은 과거가 되고 이제부터 미래가 시작된다. 그렇다는 것은 현재의 순간이야말로 모든 과거와 미래가 만들어지는 필연으로 귀결된다는 얘기다. 지금 그대의 그 육체로 살아라. 니체는 살아있는 이 순간에 잘 웃고 잘 먹고 살아 있음을 자축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처럼 춤을 추면서 잘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말했다. <아침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일에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다. 그대는 그 꿈을 책임질 수 없을 만큼 허약한가? 용기가 부족한가? 그대의 꿈 이상으로 그대 자신인 것도 없다. 그 꿈을 실현하는 일이야말로 그대가 온 힘을 다해 이뤄내야 할 평생의 숙제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대의 승부처다. 현실이라는 시간에 몸을 던져라.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는 책들이 유독 많은 것을 보면 역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일과 사람에 치이며 찌들어 사는지 알 수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니체가 말한다. "모든 일의 시작은 위험한 법이지만 무슨 일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라고.

챕터 2 자기 자신을 깨뜨려라

진정한 창조, 발견의 기쁨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특별한 일로 세상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은 독창적인 게 아니라 그저 주목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말로 독창적인 사람은 다른 이들도 이미 보았지만 아직 알아차리지 못해서 변변한 이름조차 없는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갖고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이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작은 행복에 안주하는 삶

니체는 <아침놀>에서 이렇게 썼다.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끝내 죽고 말듯이 인간도 낡은 사고의 허물에 갇히면 성장은커녕 안으로부터 썩기 시작해서 마침내 죽고 만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사고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챕터 3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무서움을 알고 난 후에 그것을 견디면서 현재를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 준다. 영겁 회귀 사상이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뮤의 철학적 에세이 <시시포스의 신화>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단 한 가지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린도스의 왕 시시포스는 제우스를 속인 죄로 바윗덩어리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리는 벌을 받게 된다. 겨우 봉우리에 다다르면 곧장 산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반복해 산 위로 바위를 올리는 벌이었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시시포스는 그 무의미한 행위를 쉬지 않고 반복함으로써 절대자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신들로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바로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었다. 인생은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온몸으로 답하는 시시포스의 행위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발단이나 결말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시점에서 상황을 파악하면 모든 일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까뮤가 주목한 사실도 바로 이것이었다. 현재를 충실히 산다는 것의 중요한 의미 말이다. 용기는 죽음조차도 죽인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 없이 조용히 갈 수만은 없다. 풍파는 늘 전진하는 사람의 벗이다. 철저히 몰두하여 온 마음을 집중해서 이것밖에 없다며 반복 작업에 쏟아부은 시간은 내면에 깊이 파고든 감각으로 남는다. 이것이 침잠 감각이다. 외견만 보는 사람들한테는 절대 보이지 않는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용기는 죽음을 죽인다. 그때 용기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지금의 삶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챕터 4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감당하면서 낙타처럼 사막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가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썼다.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에게는 그런 시대가 죽은 뒤에야 나타나기도 한다.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교육 기관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상의 황혼>에 이렇게 썼다. 나 자신에게 던지는 왜?라는 물음에 분명하게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아주 간단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흉내 내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나의 길이 명료하게 보이기에 이제 남은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

프랑스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는 남보다 일찍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기어이 절벽을 기어 올라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내 청소년 시절부터 알코올 의존증이 심해 치료 일환으로 그림을 배웠지만 엉망진창이었다. 오직 화가였던 어머니에게만 그림을 배워 1910년 전후 파리에 뒷골목이나 몽마르트르 언덕 같은 추억의 공간을 담은 풍경화를 일 년에 600장 이상 그려냈다. 그의 시대를 '백白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림물감에 모래나 회반죽을 섞어 색깔과 질감에 신경을 쓴 독특한 백색으로 사랑을 받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독감에 빠져 있던 이 시기 작품이 미술적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에 닿을 듯이 키가 큰 나무들에게 거친 바람과 악천후가 없었다면 그런 성장이 가능했을까? 인생에는 거친 폭우와 강렬한 햇살 태풍과 천둥 같은 온갖 악과 독이 존재한다. 그런 것들이 가급적이면 없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탐욕 폭력 증오 질투 아집 불신 냉담 그 밖의 모든 악조건과 장애물들… 이러한 악과 독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극복할 기회와 힘을 얻고 용기를 내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단련되는 것이다. 흑이 백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는 위대한 전환의 열쇠는 내 삶을 에워싼 모든 것을 긍정의 눈으로 보는 습관을 만들어 준다. 모든 부정을 모든 긍정으로 바꾸라는 니체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다.


파트 3 몸의 소리를 들어라

챕터 1 아이처럼 춤을 추어라

춤은 새로운 시작이다. 더운 지방산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춤을 잘 춘다. 그들에게 춤은 단순히 몸으로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늘에 올리는 일종의 기도이기도 하다. 니체는 여러 문장에서 춤을 춘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실제로 춤을 추지는 못할지라도 직접 신체를 움직여 자신 안에 억압되어 있는 감정을 해방시키는데 춤을 적극 활용하라고 강조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 번도 춤추지 않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큰 웃음도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모두 가짜라고 불러도 좋다. 니체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아이들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서 아이들과 춤을 연결 지어 이렇게 설명했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함과 망각 그 자체다. 아이들은 또한 새로운 시작과 놀이,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거룩한 긍정의 존재다. 춤은 천진난만한 그 자체로, 이는 춤이 몸 이전의 몸이기 때문이다 춤은 망각으로, 이는 춤이 몸 자체의 무게를 잊게 하기 때문이다. 춤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것은 춤을 추는 동작이 스스로의 시작을 새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누구나 멋지게 춤을 출 수 있는 감각을 갖고 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사실은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에는 아주 사소한 놀이도 정신을 맑게 하는 우물 같은 역할을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날의 기억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에 누구보다 풍부한 정신의 우물을 만들어 둔 것이다. 그 우물에서 얼마든지 물을 길어낼 수 있기에 신체의 감각이 살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언제나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정신의 우물을 맑게 하라. 자극을 받는 오감은 뇌 활력을 가져다준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기계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언젠가 이러한 감각을 대부분 잃어버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렵다. 니체가 권하는 춤이나 밸런스볼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정신의 우물을 맑게 하는 오감의 작동이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어느새 그런 감각을 대부분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이야말로 삶이 난관을 돌파하는 힘과 정신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춤은 역동적인 명상이다. 현대 무용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사도라 던컨의 말이 있다. 나는 니체에게서 춤을 배웠다. 내 무용의 원천을 이루는 세 가지는 그리스 예술, 우아한 고전 음악, 그리고 니체의 철학 사상입니다. 인위적인 제안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중시함으로써 그때까지 엄격한 형식의 얽매여 있던 춤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던컨의 정신은 니체의 그것과 흡사하다. 생명력 넘치는 몸을 동양적 신체에 관해서 말하면 상허하실이라 한다. 이것은 상반신의 힘을 최대한 빼고 골반과 배 허리를 포함하는 하반신에 힘을 싣는 신체 상태를 말한다. 상허하실을 제대로 유지하면 배꼽 아래의 중심인 단전의 에너지가 꽉 들어차는데 이때는 호흡이 깊고 안정되어 있어 온몸에 활기가 넘친다. 이런 모습에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불상을 떠올리면 된다. 니체는 에너지가 가득 찬 상태로 춤을 춘다고 표현했다. 춤을 추는 행위에 명상을 더해서 정신의 우물에 생명력을 불어 놓길 바랐기 때문이다. 춤을 춤으로서 해방감을 느껴 자신을 밝게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우리는 스스로가 창조적이라고 느낄 때 반드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챕터 2 건강한 몸의 소리를 들어라

몸은 인간 그 자체다. 동물은 항상 자기 몸의 소리에 따른다. 니체는 인간도 이성보다는 신체가 더 자신을 잘 이해한다고 보았고 그렇게 육체의 지혜를 더 믿고 따르라고 말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서 이렇게 썼다. 그대의 사상과 감수성 뒤에는 강력한 지배자가 있다. 그대가 모르는 그 현자의 이름은 본래의 나다. 그대의 육체 안에 그가 살고 있다. 그대의 육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진정한 자신은 몸 안에 있다는 말은 동양인이라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19세기 후반 유럽인들에게는 펄쩍 뛸 말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그리스도의 배경 아래 이렇게 배웠다. 정신이야말로 인간 그 자체다. 따라서 육체는 최대한 멀리해야 하고 육체의 욕구는 가능한 억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에 반기를 들었다는 부분에서 니체는 이단자 이상의 취급을 받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고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다양성이다. 육체는 또한 평화이며 가축의 무리이자 양치기와 같다.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은 몸의 도구이며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장난감이다. 이제 세계는 거대한 이성으로서의 육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복권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도 한때는 '정신이야말로 자기 자신 그 자체다. 지금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모습이다'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니체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육체로부터의 이성을 깊게 느끼고 육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삶이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달았다. 의에 소리가 들려주는 진정한 자아의 이야기의 귀를 기울여 보면 삶이 전혀 다른 풍경으로 눈에 들어오는 색다른 경험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챕터 3 세상을 큰 강처럼 품어라

좀스럽게 굴지 마라

자신을 지탱하는 주관과 철학은 굳게 지키되 그 밖의 것들은 대범하게 대자연의 흐름에 맡기라는 얘기다.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삶에 대해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언제 어디서든 그들은 침울함과 권태감에 가득한 채 몹시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리고 삶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로 말했다. 삶이란 의미 없는 것이다라고. 심지어 소크라테스조차도 임종을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산다는 것은 오랫동안 병을 병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소크라테스도 인생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니체의 눈에 비친 소크라테스는 인류의 스승이기는커녕 삶에 적대적인 태도를 지닌 좀스러운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대는 원기둥의 모습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원기둥은 높으면 높을수록 가늘어지고 아름다워지지만 그 내부는 더욱 굳세어져서 무엇이라도 짊어질 수 있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우리가 이상적으로 삼아야 할 모습을 선연한 이미지로 제시한다. 특히 큰 강물의 이미지를 품고서 일하는 사람은 기분을 전환하는데도 능숙해서 웬만한 일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사기>에 큰 강물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고사가 실려 있다. 진나라의 이사는 원래 초나라에서 건너온 사람으로 승상 여불위의 가신으로 있다가 객경의 자리에 올랐다. 이사도 쫓겨날 수 밖에 없었을 때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높을 수 있으며 하해는 작은 물줄기라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 깊음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챕터 4 욕망의 우물에 덮개를 덮지 마라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가 있다.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노벨 문학상을 받고 나서 언론에 이렇게 말함으로써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이 상은 내가 아니라 다음 세 사람 칼 샌드버그, 버나드 베렌슨, 그리고 아름다운 작가 아이작 디네센이 받았어야 했다" 바베트가 자신이 불행할 때 받아 준 자매의 아버지인 목사 100번째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최고의 만찬을 열기로 했다. 이윽고 인생 최고의 만찬을 경험한 사람들은 천상의 빛과 같은 은혜로움을 느끼게 된다. 청교도적 생활로 엄격한 금기들을 정해 놓고 순응하며 일생을 보내는 자매의 모습에 연민이 솟는 것이다. 성을 포함해서 욕망하는 일 자체가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었다. 춤추는 몸처럼 생명을 마음껏 연소시키는 일이 행복과 이어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욕망이 삶의 기쁨을 구걸하는 일임에도 그것을 부정하는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인간성을 파괴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창조도 성욕도 모두 적극적인 유혹이다. 두 가지 모두 인간 삶의 근원이 되는 활력의 우물에서 길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욕망의 유물에 덮개를 덮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니체의 산책로

챕터 5 대지와 호흡하라

대지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것. 니체는 정신의 발전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시기로 구분했다. 낙타의 시기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단계이고, 사자의 시기는 그 의무를 부정해도 되는 그리하여 새로운 창조를 목표로 진정한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사자 역시 긴장된 상황 속에서 공격적으로 살아간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천진난만하게 놀고 망각하고 창조하는 어린아이의 시기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최상의 시기라고 여긴다. 불교의 순례 예법에 오체투지라는 게 있다. 신체의 다섯 부분이 양손과 양 무릎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게 하는 절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대지에 닿는 행위를 통해 절대자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천상의 것들은 신의 영역에 속하지만 대지의 것들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품어야 할 대상이다. 천상의 것들은 인간의 외부에 있지만 대지의 것들은 인간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대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이자 우리의 생명력 그 자체다. 인간은 곧 뇌라는 도식이 일반화되어 가는 오늘날 두뇌 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니체의 지혜를 대지와의 호흡을 통해 느껴보자.

파트 4 꿀벌처럼 나누는 삶

챕터 1 인생의 진짜 기쁨이 있는 곳

나는 너무나 많은 꿀을 모아 버려서 이제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나의 꿀을 전부 가져가라.

교사의 진정한 역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 살 때 고향 마을과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혼자만의 정신 수양과 고독을 즐기며 10년 동안 지내며 결코 지루해할 줄 몰랐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마음이 변하였다. 고독을 통해 그가 찾아낸 초인 사상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프로이트는 원초적 충동에서 촉발되는 본능적 에너지와 욕망을 뜻하는 리비도가 사람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한다면서 에너지 순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는 축적된 지혜도 에너지의 일종이기에 남아돌게 되면 반드시 방출해야 한다는 원리와 맞닿는다. 차라투스트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챕터 2 행동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

중국 오지 마을의 소녀는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학교에 가고 싶어요" 라며 받아 놓은 교과서를 버리지 못한다. 그 중국 소녀는 결핍 때문에 갖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과잉 때문에 오히려 멀리하는 현실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 이렇게 썼다. 사람은 항상 껍질을 벗고 새로워져야 하고 항상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한층 새로운 자기를 만들기 위한 탈바꿈을 평생 동안 멈추지 마라. 자기 삶을 배움의 축제로 만드는 사람은 이미 차라투스트라다.

챕터 3 삶을 축제로 만드는 기술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제다. 축제라 해서 온통 시끌벅적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 시를 읊거나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거나 하는 예술적 이벤트 역시 하나의 축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하나로 묶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축제다. 산다는 것 자체를 하나의 축제로 여기면 우리의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니체는 <방랑자와 그 그림자>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너무 소홀히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먹고 정욕 때문에 아이를 낳는다고 말할 정도다. 그들은 현재보다 더 나은 멋진 삶은 여기가 아닌 어느 먼 세상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이제 현재의 삶을 확고히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흔들림 없는 믿음의 시선을 보내야 한다. 이런 태도만이 우리를 제대로 살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술을 연마하는 것도 지혜가 과잉되었을 때 나눠야 한다는 니체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다. 넘쳐흐르는 지혜는 선물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실로 인간다운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챕터 4 밟고 가벼운 기분으로 살아라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에서 이렇게 적었다. 창조적인 일을 하든 평범한 일을 하든 항상 밝고 가벼운 기분으로 인해야 순조롭게 잘 풀린다. 그래야 사소한 제한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평생 이런 마음을 지켜 나가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일을 이루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매일매일의 삶이 곧 그대의 역사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역사책이라고 말한다. 페이지마다의 내용은 남이 대신 채워 주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를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도서관의 낡은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들의 매일의 삶 자체가 곧 역사다.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이 바로 내일의 역사를 만든다. 두려워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오늘 하루를 마쳤는가? 게으르게 보냈는가? 용감하게 도전했는가? 어떤 일을 어제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행했는가? 이 같은 태도들이 하나하나 쌓여 매일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챕터 5 누가 훌륭한 교사인가

스승과 제자 그리고 동반자

논어의 위정편 내용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어느 날 태산에 오른다. 오늘은 나의 일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구나하며 서두를 꺼낸 공자는, 나는 15살에 학문의 뜻을 두었고 지학, 서른 살이 되어서는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내립, 마흔 살이 되어서는 미혹됨이 없어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불혹, 쉰 살이 되어서는 하늘의 뜻을 알았으며 지천명, 예순 살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아차렸고 이순, 일흔 살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종심. 이제부터 사제 관계는 그만두고 우리 모두 친구가 되자. 스승으로서 나의 임무는 이제 끝났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스승이 아닌 친구로 지내자. 공자가 필생의 숙원사업인 <춘추>의 저술을 막 끝낸 직후였다.

엉터리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들

성악설로 유명한 순자가 청출어람을 말했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건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가우니… 가짜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처세적인 내용들 뿐이다. 이렇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같이 가치를 판단하는 기술적인 방법뿐이다. 그들은 인간과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심지어 이렇게 쓰기도 했다 플라톤 공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교사들… 이들은 거짓말을 지껄이면서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굳게 믿었다.

챕터 6 독서하는 게으름뱅이

외우는 것이 진짜 독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피를 쏟아서 쓴 것만 사랑한다. 여기서 피는 정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냥 정신만으로는 부족하다. 땀과 눈물이 합쳐진 온몸으로 쓴 생명의 산물이어야 한다. 진정한 보물은 자유자재로 꺼내 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반복해서 외우고 또 외워서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정말로 알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리 내어 읽고 기억하는 과정을 거칠 때 비수처럼 날카로워진 지식이 나의 재산으로 축적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언젠가 한번 읽은 것일 뿐 영원히 나의 피와 살이 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흥미롭다. 대사 암송하는 과정에서 체화된 영혼이 빙의되는 것은 훌륭한 연기로 승화되곤 한다. 체험하고 있을 때는 완전히 몰두해야 한다. 중도에 체험하는 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그러면 전체를 차분하게 집중할 수 없다. 반성이나 관찰은 그 뒤에 오는 것으로 이때 비로소 새로운 지혜가 생산되는 것이다. 아포리즘이나 금언 속담 같은 말들은 인간의 지혜를 짧게 엮어 외우기 쉽게 만들어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

파트 5 창조적인 삶은 어디서 오는가

챕터 1 힘은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자기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영웅을 외면하지 마라. 더 높은 곳을 향한 꿈과 이상을 아주 오래전에 일이었다며 그리운 듯이 말하지 마라. 살면서 어느 사이에 꿈과 이상을 버리게 되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비웃게 되고 시샘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그러면 발전하겠다는 의지나 자기 자신을 극복하겠다는 강고한 마음 또한 버려지게 된다. 니체는 "진정한 숭고함은 휴식이나 웃음 또는 아름다움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아름다움을 대함으로써 얻게 되는 감동을 삶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회로를 받는 것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힘이 된다는 뜻이다.

챕터 2 쾌락과 고통은 마주 보고 있다.

만약 음악과 니체가 만났을 때.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는 태양과 이성의 신이며 디오니소스는 술과 축제 음악의 신이다. 그러므로 아폴론적인 것은 질서 잡힌 형식적 아름다움과 인간의 인식으로 구성되는 이성적인 측면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에너지로 구성되는 감성적인 측면을 이룬다 할 수 있다. 니체는 <권력의 의지>에서 사람은 자기 몸의 감각을 사랑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몸이 감각이나 관능을 저질스럽거나 부도덕한 것 또는 우리의 의식이 계획되지 않는 단순한 뇌의 화학적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멀리하지 마라. 자기의 감각을 마음껏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신체의 감각과 관능을 예술로 승화시켜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 왔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스스로를 니체주의자라고 부를 만큼 니체사상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그는 1975년에 출간한 감옥의 역사를 통해 그 속에 숨은 권력관계를 파헤친 책 <감시와 처벌>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서 샘솟는 자유의 충동에 뚜껑을 덮어 봉인해 버리려는 사회를 비판했다. 푸코는 근대 이후부터 생성된 사회적 감시 시스템이 권력에 순종하는 개인들을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감시의 눈을 항상 의식한다. 나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면 감시당하는 사람의 의식 안에 또 다른 감시자가 생겨나, 내면으로부터 끓어 오르는 감정이나 충동을 스스로 억제하고 이러한 자기 감시 시스템은 급기야 생명의 불꽃마저 약해지게 만든다.

챕터 3 내 삶에 던지는 의문 부호.

평가는 창조다. 나는 바르게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그 무엇보다 활발한 창조 행위라고 믿는다. 강한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감독이 선수들 개개인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기준을 가져야 하고 이를 선수 당사자들과 공유해야 한다. 자기 앞의 생을 다시 평가하라.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썼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사실 한번 담은 책은 많지만 내게 맞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타인의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내가 던지는 왜라는 물음의 내용을 나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왜 그 일을 하고 싶은가 왜 그렇게 되려고 하는가 왜 그 길로 가려고 하는가 내면으로부터의 이런 물음에 분명한 평가 기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왜?라는 의문부호에 스스로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됨으로써 이제 그 길을 가는 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챕터 4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처럼

힘차게 돌아가는 바퀴 같은 사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새로운 힘인가? 새로운 권리인가? 시초의 운동인가? 자신의 힘으로 도는 바퀴인가? 그대는 별들에도 지배의 힘을 미쳐 그대 주위를 돌게 할 수 있는가?

챕터 5 인생으로부터의 최후통첩

항상 도전하는 사람 곁에 있는 니체

그는 <아침놀>에 이렇게도 썼다. 천부적인 능력이 없다고 비관하지 마라. 재능이 없다면 그것을 습득하면 된다.

운명을 향해 돌진하겠다는 각오

가고시마 지방에 전해지는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울까? 뛸까? 울겠다면 뛰어라. 이 말을 좀 더 풀어 해석하면 이렇다. 언덕 위에서 있는 채로 무서워서 울 것인가? 큰 마음을 먹고 뛰어내릴 것인가? 울 거라면 차라리 뛰어내려라.

챕터 6 아모르파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하늘의 연처럼 바람에 맞서라. 연을 높이 날리면 날릴수록 땅을 밟고서 있는 나 역시 이리저리 흔들리는 연줄을 통해 지상에는 없는 바람의 감각을 맛보게 된다. 강한 바람에 펄럭이는 돛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아직 본 적이 없는가. 돛이 둥글게 부풀어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면 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그 돛처럼 정신의 거센 바람에 펄럭 이면서, 나의 지혜는 바다를 건너간다.

챕터 7 세상의 변방을 지키는 사람들.

어느 노벨상 수상자의 싸움

201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나카무라 휴지가 그렇다. 세계 최초로 청색 led를 개발하여 연간 1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렸다. 그가 받은 대우라고는 2만 엔 정도의 포상금과 과장으로 승진한 것이 전부였고 발명 특허권은 회사에 귀속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199년에 퇴사하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2년 후 소송을 제기하였다. 200억 엔을 요구하였으나 2005년에 8억 4천만 엔을 지급하는 것으로 소송은 종결되었다. '하이 리스크 로 리턴'의 사회는 절대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

단독자

자기 삶을 당당히 걸어가는 사람.

시인 이시하라 유시로의 <망향과 바다>는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군으로 복무했다는 이유로 전쟁 범죄자로 낙인찍혀 8년 동안 시베리의 수용소의 억류되었던 체험을 담은 책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포로들을 하나씩 총살 시키고 있었다. 이에 가노는 솔선하며 어려움에 맞섰는데 수용소측은 협조를 얻고자 그를 회유했다.가노가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인간이라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인간이라면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노가 스스로의 고독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서 진정으로 인간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가노를 단독자라고 불렀다. 자기 삶을 홀로 당당히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대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고들어라. 샘은 바로 거기에 있다. 자기에게 딱 맞는 무엇이 이곳이 아닌 아주 먼 곳에 가령 아직 가 보지 못한 타국 땅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발아래에 그대가 추구하는 것, 그대에게 주어진 많은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덧붙이는 글

큰 웃음을 짓는 사람이 되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 자체가 소리 높여 웃고 있는 책이다. 프랑스 장 도미니크 포비의 책 <잠수복과 나비>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니체의 큰 웃음의 예를 보여 준다. 온몸이 마비된 작가가 눈의 깜빡거림만으로 의사소통을 해서 완성한 회고록이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다. 뇌출혈로 쓰러져 날로 굳어가는 신체 안에 갇혀 버린 그는 몸이 마치 잠수복을 입은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놀라운 사실은 포비가 20만 번이나 눈을 깜빡거린 끝에 파트너가 하나하나 기록하고 조합하여 문장을 만들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하나의 문장을 열 번씩 퇴고한다. 그렇게 말을 지우거나 형용사를 넣거나 한 끝에 마침내 단락마다의 모든 말을 암기해 버린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역겹고 추한 모습에 포비는 이렇게 썼다. "내 안에 경련과도 같은 큰 웃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 너머 산인 이 상황에 최후의 일격을 먹이면서 모든 게 농담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웃고 또 웃었다. 눈물이 흘러넘칠 때까지."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라고 외치는 니체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가 눈물이 흘러넘칠 때까지 웃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포비는 이렇게 썼다. "어디선가 관악대가 왈츠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벌떡 일어나서 타일로 장식된 바닥을 딛고 빙빙 돌면서 계속 춤을 추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춤을 춘다는 것이다. 포비는 잠수복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나비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는 걸 상상한다. 거기에 운명의 벽을 돌파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경쾌함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우리 모두에게 춤을 배우라고 권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대들 자신을 뛰어넘어 크게 웃는 모습을 배워라. 그대들의 가슴을 활짝 펴라. 높게 더 높게 멋진 무용수답게 큰 웃음소리도 잊지 마라."


페이허이즈의 <니체의 인생상담소>를 루나 펄스님의 낭독으로 듣는다. 말러의 교향곡3번 4악장과 함께.

https://youtu.be/AlH8zKibdXU?si=HCvL5bRFkPx2K7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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