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중팔구

by 이용만

네 멋대로 살아보라. 내 뜻대로 살았던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지난 세월은 흘러가는 운명이려니 하고 살아온 것 같다. 새벽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에 마음의 눈이 커졌다. 신부님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 십중팔구는 남의 뜻인 경우가 많다고 하신다. 십중팔구는 남의 뜻인 경우가 삶의 모습이 아닐까? 왠지 마음대로 된 적 없어하는 나의 삶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방금 전 낭독된 독서(讀書)는 성서의 수태고지(受胎告知)에 관한 내용이었다.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잉태를 알리고 이름을 예수라고 알렸을 때, 혼전(婚前)의 요셉에게 설명하는 게 가능했겠는가. 어처구니가 없어 화(禍)부터 낼 것 같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곰곰이 묵상하고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는 점을 받아들인 기도가 성모송이다. 신부님은 '곰곰이 묵상'하는 순명의 모습을 재차 강조하신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암송에만 익숙하다 보니 성모송의 속 뜻을 잊었다.

부부댄스클럽 회장을 맡게 된 날이 떠올랐다. 몇 년 전 회장을 맡으라는 권유를 거절했고 이미 지나간 일로 잊고 지냈다. 정기총회에서 느닷없이 차기회장으로 나를 추천하는 데 깜짝 놀랐다.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좌중을 둘러보니 숨죽여 내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19로 3년간 중단된 파티와 회원의 탈회가 이어진 시기였다.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회장직 추천은 명령인지 부탁인지 회원들도 당황한 분위기였다. 과거처럼 손사래 치고 안 맡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공명심이 내 안에 깊은 걸까? 이 시점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스 아니면 노'였다. 희생을 떠맡지 않겠다면 나는 누구인가? 싶었다. 순식간에 결정이 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맡겠습니다"라고 짧은 말로 수락했다. 그때 하늘의 뜻인가 보다 싶었다.

십중팔구, 남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데 신기하게도 그것이 바로 하느님 뜻이라는 신부님의 강론에 머리와 두 눈까지 크게 떠진 것이다. 나의 뜻이란 게 앞뒤를 재고 유불리(有不利)를 따진 뒤에 하는 일 아니었던가. 그러니 나의 뜻대로 행하기도 전에 모든 사람이 나를 간파하고 있었나 보다. 열에 아홉은 내 뜻대로 흘러가는 일은 없었다.

그저 남의 뜻대로 응해주는 편이 나았다. 시류를 따르는 일이 하느님뜻이겠지 하며 안주(安住)하는 핑계로 삼았다. 수동적인 인생을 살아오게 된 이유였다. 크나 적으나 모임 회장을 맡아보라는 충고들은 안 들은 말로 여겼다. 나의 뜻도 남의 뜻도 아닌 채 십중팔구 엉터리로 살았다.

이제 맡은 책무를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다. 내 뜻을 세우지 않고 남의 뜻만 찾다 보니 중구난방이다. 체계도 없고 마음에 들지도 않아 답답했다. 남에게 들킨 답답함과 불만들이 동굴 속 메아리가 되어 '무책임한 어른 어린이'를 향해 돌진해 왔다. 나의 뜻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남의 뜻을 가져올 수 없다. 나의 뜻을 세우지 않고는 하늘의 뜻은커녕 남의 의견도 얻을 수 없었다. 과거의 수동적인 자세부터 결별하기로 했다.

탈, 휴회한 회원들에게도 재입회할 명분과 독려가 필요한 데 거절당하고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반복된 부탁은 구차한 데다 강한 거절만 불러올 뿐 그 사람까지 미워하게 되었다. 내 뜻대로 관철되지 않으니 십중팔구 남의 뜻이고 하늘의 뜻으로 돌리고 싶었다. 지성이면 감천, 진인사 대천명도 뇌리에 맴돈다. 할 수 있는 일을 다해보는 일이 진인사(盡人事)이리라. 대천명(待天命)은 진인사 후의 일이다.

남을 설득하고 제삼자의 협조를 끌어들이는 궁리라도 해야 한다. 나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 되도록 해야겠다. 체념처럼 들렸던 신부님의 '십중팔구' 말씀이 감사하다. 묵상하며 되뇌는 성모송에서 하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본 것 같아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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