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음먹었던 유서를 쓰기로 한다. 올해 초 할 일의 하나가 유언장 작성이었다. 서재에는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서 잘 들어오고 있다. 유서를 쓰기에 좋은 날씨다. 코로나19로 들려온 지인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자주 접한다. 직장 동료의 아들이 백혈병으로 고생했다가 완치되었는데 서른 갓 넘은 나이에 코로나19로 떠났다. 청년이었는데도...
지난여름 병원 중환자실이 모자란다고 하던 때, 나도 감기 기운이 왔다. 한밤중에 고열과 오한에 놀라 이불을 둘러썼다. 의사는 항생제를 바꿔가며 폐렴 직전이라고 말했다. 바로 응급실에 가셔도 이상할 거 없다니 공포스러웠다. 종합병원 응급실로 보낼 태세였다. 그렇잖아도 알레르기와 천식은 만성 폐 질환으로 진전되어 약도 계속 복용 중이었다. 응급실로 떠나보낸 후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는 말이 실감 났다. 유서를 쓰는 일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었다.
우선 남들은 유서를 어떻게 적고 있는가 하고 찾아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사전적 정의도 찾아본다. 유서·유언장은 "유언을 적은 글"이라는 뜻으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민법에는 "유언서"라고 표현하고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술 증서 5종을 규정하고 있다. 유언이 법률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법이 정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 자필(自筆)로 유언의 내용과 날짜, 주소, 성명을 쓰고 날인(捺印) 해야 한다는데 타자(打字)를 친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나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니 법적 효력도 없다. 그저 나의 뜻이 전달되면 되지 싶어 유서 초안이라도 잡아 보려는 중이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편지들도 모두 불태웠다. 해외에서 보낸 항공우편 봉투에 적힌 편지들이었다. 90세 모친께 동의를 구하는 듯 여쭌 뒤 모든 것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오랜 간병에 지친 나와 형제들은 아버지 유품 등을 둘러보고, 태워 버리는 것을 순리처럼 여겼다. 홀로 남은 어머니도 치매가 진행 중이니 간병에 여념이 없었다.
유서 쓰는 일이 좀 이르지 않나 싶지만 주변에 이미 유서를 3년마다 고쳐 쓰는 사람도 있다. 금융문제는 사실 쉬운 일이다. 은행 협회를 통해 일괄 조회가 된다. 내용을 들어보니 공인인증서 비밀번호가 첫 번째였다. 장기기증 약속도 포함시켰다고 했다. 출판기념회를 겸한 생전 장례식도 좋아 보였다. 우선 자동차부터 매각한다.
아이들이 모르는 일들을 우선 살펴야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보내왔던 수많은 편지들이 그립다. 불태워 없앤 편지여서 더 그리웠다. 물질이 아닌 정서적인 유산은 내겐 없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얼마 전 『조개 줍는 아이들』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영국 해안가 마을 콘웰 지방에서 화가였던 아버지가 딸에게 선물로 주었던 한 점의 그림 이야기였다. 세월이 흘러 유명해진 아버지 그림 때문에 자녀들과 유산 갈등이 벌어지는 영화였다. 임종을 앞두고 회의를 느낀 할머니는 마을회관에 그 그림을 기부하였다. 심리적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감동이 마음을 흔들어 깨웠다.
30여 년 전 장인이 돌아가시기 전 일이 떠올랐다. 장인은 가끔 그림을 그리셨고 마음 맞는 이들은 가져가기도 했다. 내키는 대로 베니아 합판에도 그렸다. 캔버스와 유화 재료들도 사드렸지만 그저 ‘부끄러운 그림’이라며 대단찮게 여겼다. 어느 날 장모님이 ‘할아버지가 그림을 다 태우시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내는 급히 아직 타지 않은 그림을 챙겨 왔다. 딸만 다섯이었던 당신은 선산을 마다하고 화장하라고 당부하셨다. 장인어른의 그림들은 거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다. 돌아볼 산소도 없음을 아쉬워하던 아내는 그림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는다. 아이들도 부모의 흔적을 아쉬워하지는 않을까?
큰 딸아이가 세 돌 되던 어린이날, 윤극영 동화작가의 전시회에서 기념으로 '고기잡이'그림을 한 점 샀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로 시작되는 동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이 아이들과 가장 정서적인 끈이었다. 외손녀 하나뿐이니 당연히 손녀 몫이라고 할 참이었다. 아차!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막내 딸아이에게 아이가 생기면 그림은 하나뿐인데 어쩐다? 그림의 가격이 궁금해졌다.
어느 정치가의 억울한 자살 소식을 뉴스로 들었다. 그의 방은 요 와 이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 관한 선행이나 정치적 내용보다는 소박한 전경만 기억에 남아 깔끔해 보였다. 흔적을 남겨 무엇하려는가 싶기도 했다. 귀한 추억이라도 나 스스로 처분하지 않으면 짐만 될 수 있다. 장인이 그림을 태웠듯이 나도 흔적을 지워내야 할 것 같았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속 글과 사진들은 어쩌지? 삭제 버튼 하나로 다 지워지겠지만 과연 할 수 있을까? 마음은 중심을 잡지 못한다.
멀쩡히 살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남들은 잘 써두고 고치고 있는 게 신기하다. 코로나19 같은 느닷없는 죽음인지 골골 수명을 다하는 자연사일지 알 수 없다. 미래를 모르는 사람의 일이다. 남은 이들에게 불편을 초래하지 않을 일들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언제라도 죽을 태세로 살던 사람들이 위대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엄두도 못 내니 '너는 아마 죽어 봐야 알 게야' 하고 내 안의 내가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