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청소년 토지 1부 1권(박경리 원작 대하소설, 토지 문학 연구회)
"우리 민족문화가 난도질당한 데는 삼박자(三拍子)가 맞았다. 일제의 민족말살을 위한 문화파괴, 기독교문화, 동경유학파 같은 신지식인의 계몽주의는 각기 그 속셈은 달랐지만 우리 문화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에는 손발이 맞았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문학을 깊이 생각하고 싶었다.
나는 항상 청소년들이 토지를 읽어 주기를 열망해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그 핍박과 억압 속에서 굶주리면서도 우리의 것을 지키려 했고 잃은 강산을 찾으려고 저항했던 그 시절, 잊을 수 없지요. …그러나 나는 단순히 그 시절을 전하기 위해, 일깨우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와 이 세상의 생을 받아 나온 모든 생명들의 삶의 부조리, 그것에 대응하여 살아남는 모습, 존재의 본질적 추구를 같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머리말 ‘청소년에게 드리는 말씀’ 중에서 2002.12.13
청소년 토지는 전체 12권으로 되어 있다.
제1부 1 2 3권 1897년 한가위부터 1908년까지 약 10년간, 경남 하동의 평사리를 무대로 하여 5대째 대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최 참판댁과 그 소작인들의 이야기.
제2부 4 5 6권 1910년부터 약 7~ 8년간 간도에 정착한 서희 일행의 이야기. 서희와 길상의 혼인, 일본의 밀정이 된 김두수와 길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의 대립 등이 펼쳐진다.
제3부 7 8 9권 최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귀국한 다음 해인, 1919년 가을부터 1929년 광주 학생운동까지, 3.1 운동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지식인들의 갈등과 혼란상이 그려진다.
제4부 10권 1930년대 일제의 폭압과 혼란상이 여러 인물들을 통해 보인다. 조선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예술, 사상, 민족성 등의 대한 깊은 통찰이 전편에 흐른다.
제5부 11 12권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민족의 삶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서희는 양현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는다.
제1부 1권
제1장 어둠의 발소리/ 한가위/ 수수께끼/ 장날/ 마을 아낙들/ 오광대/ 서울 양반/ 무당의 딸/ 악당과 마녀/ 김 훈장과 조준구/ 습격/ 유혹/ 서희와 길상/
제2장 추적과 음모/ 사라진 여자/ 윤 씨 부인/ 불쌍한 월선이/ 암시/ 양반의 행패/ 황금의 무지개/ 금지옥엽/ 사냥/
부록 : 1부의 주요 인물/ 1부의 가계도/ 1부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
<1부 가계도>
최 참판가
최ㅇㅇ*윤 씨 부인 우관스님 김개주
최치수*별당아씨 김환(구천이)
최서희
이용 가족
이용*강청댁 이홍 월선
임이네 가족
임이네*칠성 임이
김이평 가족
김이평*두만네 (간난할매의 양자는 영만)
김두만 김영만 김선이*장종학
김평산*함안댁
김거복 김한복
이동진*염 씨
이상현*박 씨 이상열
김영팔*판술네
김판술 김또술 김제술
주변인물들 :조준구 김훈장 또출네 서서방 강포수 봉기 영팔이 한돌 문의원 김진사댁 며느리 길상이
<1부 주요한 역사적 사건>
동학농민운동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하여 동학의 접주인 전봉준(準)·김개남(金·손화중 등과 농민들이 함께 궐기한 농민혁명. 동학혁명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고부
의 민란으로 시작된 이 혁명은 1894년 전반기까지만 해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민란의 형태였으나, 대원군 섭정과 청일전쟁 발발에 항일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 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우금치(金)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퇴각하였다. 결국 전봉준은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지만,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토지>의 1부에서는 동학접주인 김개남을 모델로 한 김개주가 등장하고, 김환과 송관수, 또출네 등 많은 인물들이 이 운동에 직, 간접으로 관계되어 그려지고 2부 이후에는 김환을 중심으로 모인 동학잔당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운동은 무엇보다 우리의 자생적 사상인 동시에 반외세를 지향한 순수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전편에 걸쳐 작가는 그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다.
공사노비제 폐지
1894년(고종 31) 6월, “공노비(公와 사노비私)에 관한 규정을 일체 폐지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문벌(門閥), 양반(兩班)과 상인시들의 계급을 타파하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
는 규정에 의하여 공사노비의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에 의해 우리나라 역사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던 노비제(制)와 신분제(身分制)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노비신분을 이탈하게 된 사람이라도 양반가 노비였던 사람은 종전과 같이 취급되는 등의 폐단은 그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토지>에서는 최치수의 친구 이동진이 공사노비제 폐지가 명해지자마자 노비문서를 불태웠으며 자신의 노비들을 내보냈다. 반면 최 참판가에서는 노비가 종전과 다름없이 취급되었으나, 최서희가 간도로 이주하면서 실질적인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사라지게 된다.
갑오개혁
1894년(고종 31) 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친 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 씨 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의 중요한 내용은 사회적인 개혁으로, 반상(常)의 계급타파, 문벌을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인신매매의 금지, 천민대우의 폐지 등 전통적인 양반체제 하에서의 신분제도를 철폐하였다. 이 외에 죄인의 고문과 연좌제(식스制)의 폐지, 조혼금지, 자유의사에 의한 과부의 재혼, 양자제도의 개정, 의복제도의 간소화 등 인습적인 전통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은 갑오개혁은 조선 개국 이후 500년을 이어온 구제도를 일신한 제도상의 근대적 개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일본의 침략적 의도에 따라 강행된 타율적인 개혁이므로 국내의 항일세력은 크게 반발하였다. 또한 일본의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되었고, 이와 함께 친러적인 세력이 등장하여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을미사변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갑오개혁을 통하여 일본은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여하게 되었으나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이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친미, 친러 세력이 우세하여지고, 배일세력이 증가하자,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을 통해 민비를 시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이로써 다시 일본은 친일파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 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1902년의 콜레라 유행
1902년 7월 중순, 의주에서 콜레라 유행이 보고된 이후 점차 콜레라가 남하하자 조선정부는 1899년 반포된 검역정선규칙에 따라 중국에서 오는 배를 검역하기 시작하였고, 고종은 방역사무국을 설치하고 조선에 와 있던 일본, 영국, 미국, 독일의 의사 5명을 사무위원으로 고용했으며, 전국적으로 방역작업을 확대실시하였다. 잠시 남하를 멈추었던 콜레라는 9월에 접어들어 서울에 대유행하게 되었다. 고종은 은화 3천 원을 내려 방역비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방역 구료위원으로 광제원 임시위원이 다수 임명되어 환자를 구하였다. 광제원에서는 수구문 밖에 피병원을 설치하여 빈민 환자를 위한 구료를 벌여나갔고, 의학교 졸업생 18명은 매일같이 각 지역을 순시하면서 방역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 말부터는 방역 구료를 위한 위원을 무더기로 임명하여 912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해 내부의 통계에 의하면 콜레라 환자와 사망자수는 모두 합쳐 12,873명이었다.
<토지>에서는 이때 유행한 콜레라가 이야기의 전환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 콜레라 유행에 의해 최참판가의 윤 씨 부인을 비롯해, 마름 김서방, 최참판가 침모 봉순네, 이용의 처 강청댁 등이 사망하는 것으로 나오며 이 사건으로 최서희와 이용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을사보호조약
1905년(광무 9)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 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키기 시작했고, 급기야 1905년 11월 9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조선에 대한 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이토는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案)을 놓고 한규설卨) 이하 여덟 명의 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결국 이완용을 비롯한 다섯 명의 대신이 이 협약에 찬성을 표시하여 강제 통과되었다. 1905년 11월 20일 자의 <황성신문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이 소식은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토지>에서는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조준구의 친일적 면모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반면 김훈장은 평사리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건을 설명한 후 의병으로 나설 것을 촉구한다.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평사리의 농민들 일부가 최참판가를 습격한 후 의병이 되어 산에 들어간 것도 이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