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론 모알렘
원제 Survival of The Sickest. 샤론 모알렘 Sharon Moalem 2006년 저술. 뉴욕 마운트 시나이 의과대학 유전, 질병, 난치병 연구 박사이다. 김영사 출간, 옮긴이는 김소영 통번역전문가다. 전문용어가 많음에도 번역과 서술이 잘 되어있어서인지 이해하기 쉽고 흥미를 유발한다. 유려한 문장으로 단순한 번역을 넘어 옮긴이의 정성에 감동하게 된다. 좋은 출판사 이미지를 갖고 있는 김영사에서 큰 글자책으로 만들어 읽기에도 좋았다.
저자는 그의 할아버지에 대해, 무언가 찌뿌둥한 때 언제나 헌혈을 하고 나면 힘이 솟고 기분이 좋아지셨다고 기억한다. 혈색소침착증(다른 말로 혈색증) 환자였다. 혈색증은 서유럽인의 30%에서 유전병의 복제본 유전자를 보유할 정도로 흔한 질병이다. 후손인 저자 또한 18세 때 할아버지와 같은 철분 과적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혈색증으로 인한 할아버지와 자신의 경험적인 사실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고, 71세 할아버지의 알츠하이머와 혈색증의 상호 연관성도 밝혀냈다.
‘생명체란 모두 두 가지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 바로 생존과 번식이다’라는 명제아래 유전자의 진화과정을 역사적으로 폭넓게 조망하였다. 샤론 모알렘의 저서는 의학과 잘못된 통념에 대한 신비와 기적에 관한 책이며, 생존과 창조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번역된 책 제목이 '아파야 산다'이다. 번역을 통해 오히려 실감 나는 제목이 된 책이라고 응원하고 싶다. 번역자 김소영이 '옮긴이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원어 제목 Survival of The Sickest으로는 뭔 말이지 싶었다. 구글 번역기에 물어보니 '가장 아픈 자의 생존?'이라고 나온다. 책 제목을 정하는 일이 늘 어려운 작업이긴 하겠지만, 옮긴이의 고뇌가 많았을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 있지만, 비교적 잘 알려진 질병들의 유전인자를 중심으로 기후, 역사적 상황 등을 예로 들면서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였다.
1. 철들면 죽는 병, 2. 빙하기를 이겨낸 당뇨병, 3. 콜레스테롤의 딜레마, 4. 말라리아를 부탁해, 5. 세균과 인간, 6. 바이러스의 재발견, 7. 콩 심은 데 팥 나는 사연, 8. 죽어야 사는 생명의 대원칙등 모두 8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역사적 사건들 또는 돌연변이 같은 우연한 상황이 빚어내는 이야깃거리들이 '질병은 재앙이 아닌 축복!', 명실상부하게 '반전의 진화학'이라고 격찬을 받으며 유전과 질병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놀라게 된다.
1. 철鐵 들면 죽는 병
정상일 때, 즉 혈중 철분 양이 충분할 때 우리 몸은 알아채고 내장에서 흡수되는 철분양을 줄인다. 하지만 혈색소침착증(다른 말로 혈색증)은 항상 철분이 부족한 것으로 인식하는 유전병이다. 모든 생명체는 철분을 좋아한다. 박테리아나 균류, 원생동물에게 인간의 혈액과 조직은 철분 노다지이다. 몸속에 철분을 너무 많이 공급하는 것은 이들에게 잔칫상을 차려 주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철분이 공급되면 박테리아는 쑥쑥 자라난다. 헌혈이나 사혈로 혈중 철분을 줄이면 개운한 기분을 느낄 만큼 치료효과를 거두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중세 가래톳 흑사병으로 사망자는 2,500만 명이 넘었다. 일단 세균이 침투하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의 임파절이 통증을 일으키며 부어올라 마침내 살갗을 터뜨려 버린다. 폐에 침투하면 풍매성이 되고 열에 아홉은 죽는다. 공기를 통해 전염도 빨라진다. 1347년 가을 이탈리아 메시나에 정박했던 제노바 무역 선단이 감염 역병의 근원지로 지목된다. 이 선박들이 항구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이미 선원 대부분이 사망했거나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맙소사 우리 배가 입항하는데, 선원은 1000명인데 이 중 살아남은 자는 열 명도 안 되는구나. 중략." 최근 연구에 따르면 철분이 많은 개체 군일수록 역병에 더 취약하다. 과거에는 건강한 성인 남자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험했다. 1625년 보톨프 교구의 역병 연구에 따르면 15~44세 남성은 같은 연령대 여성에 비해 두 배 더 많이 병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성인 여자들은 월경 임신 수유 등으로 정기적으로 철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 대표되는 역병의 시대를 겪은 인류에게 이제 철분은 더 이상 다다익선은 아닌 것이 되었다. 소말리아 난민 수용소에서 말라리아, 결핵, 블루셀라 균등 다양한 악성 병원체에 노출된 유목민들을 위한 철분치료 중 발견한 사실이 주목할만했다. 그들에게 빈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염되지 않은 게 아니라 빈혈 때문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철분 고정'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몸에서 감염에 가장 취약한 곳은 뚫려 있는 부분이다. 감염 인자는 철분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인체 출입 통로는 철분 출입 금지 지역으로 선포되는데 이것이 '철분 고정'이다. 이제 과학자들은 우리의 몸과, 철분, 감염, 혈색증, 빈혈 같은 질병이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서방에서 방혈(사혈)이 필요할 때 가는 곳은 이발소였다. 이발소 앞에 세워 놓은 기둥은 사실 방혈을 상징했다. 꼭대기 주발은 거머리를 보관하던 사발을, 밑바닥 주발은 피를 담던 사발을 나타냈다. 기둥의 적색과 백색 나선은 중세 때 붕대를 세탁한 후 기둥에 널어 말리던 데서 비롯되었다. 기둥에 널어놓은 붕대가 바람에 날리다 꼬여 기둥 주위에 나선형으로 휘감기곤 했던 것이다.
이발사들이 이발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혁명의 기요틴을 집행한 자들이 이발사이기도 했다. 당시에 왜 이발사들이 외과 의사 노릇까지 했을까? 면도날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순교자를 처단하던 망나니는 휘광이라고도 했던가. 누군가는 해야 할 직업의 하나였을 뿐이다. 18~19세기 의사들은 방혈을 정기적으로 시행하다가 환자들이 기절하면 혈액이 적정량 뽑힌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인류가 미개해서 모르고 있던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없다. 속속 과학적 지식이 역전되고 반증되는 것을 더욱 많이 목격하고 있어서다. 침과 뜸 같은 동양 의학과 아로마와 마사지 요법은 동남아에서 인기 있지만, 과학적 근거로 입증되고 있지 않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사혈 부황이 동물실험에서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입증되었듯, 인류가 모르고 있어 효과 있는 치료 영역을 거론할 수조차 없다. 무더운 날씨 탓에 목덜미 주위에 벌겋게 부황을 뜬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 일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 아니던가.
최근 나의 신체 일부에서 혹을 여러 군데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의사들은 혹의 크기를 비교해 가며 추적 관찰을 하면서 암이 아닌지를 지켜보고 있다. 체온이 1도 올라가면 면역력도 증강되고 암에도 걸리지 않는다던가? 체온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을 본 탓이었을까. 군소리 한마디 없이 누워 침을 맞기도 하고 은은한 쑥향을 음미하면서 뜸을 뜨며 경건한 생활습관을 기르려 애쓰는 중이다. 이곳저곳의 보이지도 않지만 잠재적으로 크기를 키워갈 것 같은 암세포를 생각하면서 민간요법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네에 유명한 사암당 한의원에도 쫓아가보고 줄을 서면서 동년배들처럼 건강에 대한 생각들이 서로 닮아가고 있는지 실감한다.
2. 빙하기를 이겨낸 당뇨병
당뇨병의 학명은 diabetes mellitus인데 '벌꿀 속으로 지나간다'이다. 당분이 많이 들어있는 소변을 보는 것은 당뇨병에 걸렸다는 첫 신호이다. 인슐린이 없어 포도당을 제대로 돕지 못하여 혈당수치가 치솟는다. 탈수증 혼수상태 심장병 발작 혈관괴저를 일으키기도 한다. 세계보건지구 WHO에 따르면 전 세계 당뇨병 환자는 1억 7,100만 명으로 추산되며 2030년이 되면 두 배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당뇨병은 인간의 몸과 설탕 특히 포도당이라는 혈당과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탄수화물이 분해될 때 생성된 포도당은 뇌의 연료이고 단백질과 에너지를 만드는 재료이다.
나이테 한 개당 1년씩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17세기 경의 기후 변화가 찾아와 100여 년간 기운이 크게 떨어진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발견했다. 저글러스가 발견한 100년간의 추위에 힘입어 아름다운 음악이 탄생할 수 있었다. 유명한 스트라디바리를 비롯한 유럽 바이올린 제작의 거장들이 빚어낸 뛰어난 음은 다름 아닌 100년간 얼어붙었던 시절에 자란 나무의 치밀한 목재 덕이었다는 이야기다.
어린 드라이어스 Younger Dryas로 명명된 이 혹한의 야생화는 북극에 사는 꽃이었다. 그런데 12,000년 전 스웨덴에 이 꽃이 널리 퍼져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마지막 빙하기 이후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다가 훨씬 더 추운 날씨가 빠르게 밀어닥쳤던 것 같다. 냉동 보존 기술은 아마도 21세기 중반쯤에는 냉동된 몸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거라고 홍보를 하고 있다. 이누이트 사냥꾼들은 빙점에 가까운 손 피부 온도를 불과 몇 분 만에 10도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혹독하게 추웠던 한국전쟁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에 비해 동상에 훨씬 더 잘 걸렸다.
추위에 적응한 놀라운 생명체는 숲 개구리이다. 기온이 어는점 가까이 떨어지는 것이 개구리 피부에 감지되면 몇 분 후에 피와 장기 세포에 있는 수분이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밀려난 수분은 소변으로 배출되지 않는 대신 복부로 모인다. 이와 동시에 개구리 간에서는 엄청난 양의 포도당이 혈류로 방출되기 시작한다. 추가 분비되는 당 알코올에 힘입어 혈중 당분 수치가 100배 상승한다. 이 다량의 당분 덕택에 개구리의 혈류에 남아 있는 수분의 어는점이 크게 낮아진다. 결국 개구리는 설탕 덩어리 부동액으로 바뀌는 것이다. 얼어붙은 개구리를 해부해 본 스토리 박사는 개구리 피부와 다리 근육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평평한 얼음판을 발견했다. 개구리는 자기 장기를 조심스럽게 얼음 위에 올려놓은 셈이다. 이식할 인간 장기를 운반할 냉각기에 얼음을 더 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어붙은 채로 잠을 자는 동절기에 이 개구리는 피부리노겐이라는 응고 인자를 다량 생산하며 어는 동안 기관이 손상될 경우 치료까지 하게 된다. 수분을 없애고 당분을 높여 추위에 대처하는 것은 포도가 하는 일이다. 개구리도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당뇨병 덕분에 유럽 조상들이 어린 드라이아스의 갑작스러운 추위를 이겨냈을 가능성이 있다. 추위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의 몸이 당뇨화된 것이다.
3 콜레스테롤의 딜레마
생화학적 차원에서 인간과 태양이 실로 중요한 양방향 관계에 있다. 햇빛은 인체의 비타민 D 형성을 돕는 동시에 체내에 저장된 엽산을 파괴한다. 비타민 D와 엽산은 둘 다 건강에 필수 요소이다. 체내 비타민 D는 콜레스테롤을 변환시켜 만든다. 최근 콜레스테롤은 햇빛처럼 피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생존에 100% 필요한 성분이다. 콜레스테롤은 세포막 형성과 유지에 필수적이다. 뇌의 신호 발송 기능을 돕고 면역 시스템을 유지하여 암 등의 질병을 예방할 수 있게 해 준다. 에스트로겐, 테스토스테론 등 호르몬의 주원료이며, 체내 생성되는 비타민 D의 필수 성분이기도 하다.
이 화학 과정에 햇빛이 꼭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광합성과 비슷하다. 피부는 인체의 최대 장기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피부는 면역 신경 순환시스템 신진대사와 관련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엄연한 장기이다. 체내에 저장된 엽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비타민 D 제조의 핵심 과정이 진행되는 곳도 바로 피부 속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시신경에 도달하는 햇빛이 크게 줄어든다. 따라서 뇌하수체에 보내는 경고도, 멜라노사이트 자극 호르몬 분비도, 멜라닌 생산량도 덩달아 크게 줄어든다. 따라서 햇볕에 더 많이 타게 된다. 스칸디나비아 사람이 적도에 있다면 선천적인 태닝 능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열대의 태양에 보호 장치 없이 노출되면 피부암은 물론 엽산 결핍 등 각종 문제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미국에서 매년 6만 명 이상이 흑색종이라는 피부암에 걸린 다. 이는 아프리카의 미국인에 비해 유럽계 미국인이 10~40배나 높은 수치를 보인다. 철분 과적과 당뇨병이 그렇듯이 어느 한 세대에서는 진화적 해결책이었던 것이 다른 세대에서는 진화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재채기 소리 비슷한 ‘아추’ 증후군이라는 것은 재채기가 나는 장애이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에 노출될 때 걷잡을 수 없이 재채기가 나는 장에로 알려져 있다. 과거의 조상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동굴에서 보낸 시절에는 이런 반사 작용이 코나 상부 호흡관에 들어붙은 곰팡이나 미생물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고혈압을 '소리 없는 살인자'라고들 한다. 1930년대 흑인들은 모두 고혈압에 쉽게 걸리는 체질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들의 고혈압 비율은 미국의 아프리카계 후손들과 다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염분은 특히 고혈압과 관계에 있다고 밝혀진 후에 한동안 기피 대상이 되었으나 사실 체내 화학 작용에 필수 성분이다. 또 체액 균형과 신경세포 기능을 조절한다. 인간은 염분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염분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이걸 많이 섭취하면 고혈압에 걸릴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노예 상인들에 의해 미국에 끌려올 때 끔찍한 상태에 방치되었다. 물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염분을 많이 유지할 수 있는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여분의 염분 덕에 치명적인 탈수를 피할 정도의 수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의 미국인들로 하여금 높은 염분 유지 능력을 ‘부자연스럽게’ 선택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능력이 오늘날 염분 다량 섭취와 만나면 고혈압이 탄생한다. 오늘날 고 콜레스테롤에 가장 널리 처방되는 것은 스타틴스라는 약물군이다. 전반적으로 안전한 약물이라고 생각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타틴스는 간 손상 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햇볕을 충분히 쬐어 콜레스테롤을 비타민 D로 변환함으로써 과잉 콜레스테롤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평생 리피톨(콜레스테롤 감소제)을 먹기보다는 실내 태닝장에 들르지 않을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4. 말라리아를 부탁해
4대 미각은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인데, 제5의 미각인 '감칠맛'이 점점 주목을 받고 있다. 쓴맛은 식물에서 포식자를 피하기 위한 독성의 화합물로 섭식 저해 물질이었다. 식물은 독물 생산 능력도 탁월하다. 1940년대 서부 호주에서 양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가 찾아왔다. 건강하던 양이 임신이 안 되거나 유산되는 사태가 속출한 것이다. 바로 유럽 토끼풀 때문이었다. 강력한 피토에스트로겐을 생산함으로써 어른 양들의 불임을 유발해 새끼출산을 막는 것이다. 식물 피임 요법에 바탕이 되는 피임약을 개발하기도 했다. 토끼풀 대신 멕시코 고구마를 사용했을 뿐이다. 흰 독말풀은 광기를 일으킨다. 셀러리는 소랄렌이라는 독물을 생산하여 자신을 방어한다. 말라리아 예방의 효과가 있는 최초의 약은 키나 나무껍질에서 나왔다. 100년이 지난 뒤 퀴닌을 추출했다. 그나마 말라리아 변종은 퀴닌에도 내성을 갖고 있으니 예방약 처방전을 따로 챙겨야 할 것이다.
채소를 먹어라. 그런데, 채소를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 대자연은 이처럼 헷갈리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피토에스트로겐이 불임을 일으킨다고는 하지만, 대두에 함유된 피토에스트로겐 성분은 전립선암세포의 생장을 멈추고 폐경을 완화해 준다. 고추의 매운맛 캅사이신은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하며 신진대사율을 25%까지 높여 준다. 관절염과 수술 통증 완화를 돕는다. 셀러리에 함유된 소랄렌은 피부암을 일으킬 수 있는 반면 건선이 있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마늘에서 추출된 알리신은 혈소판이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하여 혈전이 생기지 못하게 함으로써 심장병 예방에 큰 효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스피린은 원래 벌레들을 퇴치하는 버드나무껍질의 화학 물질에서 나왔다. 오늘날 아스피린은 만병통치약에 가까운 혈액 희석제, 해열 진통제이다. 강력한 항암제인 탁솔 역시 태평양 주목이라는 나무의 껍질에서 추출했다.
5. 세균과 인간
드라쿤클루스 매디넨시스라는 기생충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을 괴롭혔다. 이 기생충의 유충은 기니충이라고 하는데 외딴 열대지역 호수나 잔잔한 물에 사는 물벼룩에게 잡아먹힌다. 살아남은 유충은 소장에서 나와 몸속으로 이동하여 성장하다가 짝짓기를 한다. 성충은 60~90cm 길이에 직경은 스파게티 한 가닥 크기로 자라서 보균자의 피부로 이동한다. 표면에 도달한 기니충은 산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살갗을 태워 빠져나갈 구멍을 뚫는 것이다. 물집이 잡힌 후 통증을 일으키며 터지면 벌레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 벌레는 물을 감지하자마자 수천 마리의 유충으로 가득 찬 우유 빛 액체를 방출한다. 전 과정이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치료법은 기생충을 막대에 감은 후 서서히 조심스럽게 빼내는 것뿐이었다. 서두르면 곤란하다. 기생충이 터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감염된 사람은 더욱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사망하는 수도 있다.
숙주 조정이란 기생 동물이 숙주에게 자극을 주어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돋게 하는 현상을 말한다. 기니 충의 경우 찬물에 들어가게 하려는 충동을 예로 들 수 있다. 광견병 바이러스가 숙주의 침샘에 정착하면 숙주는 침을 삼키기 힘든 상태가 된다. 그래서 광견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물은 입가에 거품을 물고 있다. 불안하고 공격적인 동물은 물어뜯기 마련이다. 그러면 입가의 침거품이 가득 찬 광견병 바이러스가 전염된다. '화가 나서 물어뜯기 + 침'은 새로운 숙주의 탄생 공식이다. 바이러스의 생존과 번식을 의미한다. 공격적이면서 화를 내는 행동을 두고 ‘입에 거품 문다’고 하는데 광견병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전염병 증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숙주 조종의 부산물이다. 요충이 분비하는 알레르겐도 가렵다는 것 외에는 무해하지만, 어쨌든 아이가 항문 근처 가려운 곳을 반드시 긁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톡소 플라스마 곤디, 줄여서 T. 곤디는 고양이에서 고양이 주인으로 옮겨 가면서 정신 분열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아동의 강박 신경증과 연쇄상구균 감염 간에 연관성이 있다고 밝혀졌다. 또한 성병이 성적 행동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참신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미생물은 속도가 더 빠르다는 진화적 이점이 크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발견한 페니실린은 14년 후 페니실린이 최초로 인간의 치료에 사용되었을 때 페니실린에 내성이 있는 포도상구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8년이 흐른 1950년에는 포도상구균의 40%가 페니실린에 내성을 갖게 되었다. 1960년에는 80%로 높아졌다. 1996년 일본에서는 슈퍼 최신형의 '반코미신'에도 내성을 갖는 포도상 구균이 보고되었다.
미생물이 숙주를 파괴하는 정도를 병독성이라고 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기생균의 병독성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진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사례도 있다 1991년 페루에서 시작된 콜레라가 상수도 위생이 양호한 칠레에서는 병독성이 낮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며 사망자가 적었으나, 에콰도르 같이 상수도 위생이 불량한 국가에서는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면서 더욱더 해로워졌다. 세균에 대해 한 가지 항생 무기를 사용하면 세균은 그에 대항할 방어 무기를 진화시키는 것과 같은 끊임없는 군비 경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진화의 종착점을 알고 있으므로, 세균이 그곳을 향해 자유롭게 진화해 가도록 환경을 조절하면 인간에게도 세균에게도 이득이 된다.
6. 바이러스의 재발견
18세기말 영국 에드워드 제너는 시골 의사로서 놀라운 패턴을 발견했다. 젖 짜는 여자들이 젖소와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우두에 걸렸고, 사람이 우두에 걸리면 아주 가볍게 앓고 지나간다. 그런데 한번 우두를 앓고 나면 천연두에는 걸리지 않는 듯했다. 우두에 걸린 젖 짜는 여자에게서 긁어낸 종기를 주사해서 여러 명의 10대 소년들을 감염시켜 보았다. 백신을 손에 넣게 된 배경이다.
돌연변이는 생물체가 방사선, 화학물질, 태양의 흑점에 영향을 받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매클린톡은 튀는 유전자 jumping genes를 발견했다. 1983년 그녀 81세 노벨상 수락연설에서 게놈을 재구성하며 대응하게 될 인류의 미래를 들려주었다. 1997년 대장균에게 평소 먹던 것을 빼앗고 유당만 주자 돌연변이 속도가 크게 증가되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것은 초돌연변이론에 힘을 실어 주었다. 세균의 생존에 필요한 돌연변이가 평소보다 1억 배나 빨리 일어났다.
와이즈만 장벽은 생식세포와 체세포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다. 와이즈만 이론은 체세포 내의 정보가 생식 세포로 절대 전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돌연변이는 생식 계열 외부에서 항상 발생한다. 흡연으로 인한 폐세포의 돌연변이 등 체세포 돌연변이의 경우 특히 그렇다.
지난 수백만 년간 인간은 생명의 차에 바이러스를 태워 주었고 바이러스는 그 보답으로 그들의 방대한 유전 집합체로부터 일부 암호를 빌려올 수 있는 기회를 인간에게 주었다. 바이러스는 돌연변이를 일으키기에 능 한 덕에 유용한 유전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고, 그 속도는 바이러스의 힘을 빌리지 않은 인간에 비해 훨씬 빠르다. 결국 인간은 바이러스와의 공조에 힘입어 복잡한 생물체로 빨리 진화했는지 모른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진화했다면 복잡한 생물체로 진화하는 속도는 훨씬 늦었을 것이다.
7. 콩 심은 데 팥 나는 사연
후생 유전학(epigenetics)이라는 말은 1940년대에 생겼는데 그리스 접두어 epi는 '그 위로, 그 후에, 추가로'라는 의미이다. 2003년 갈색 날씬이 쥐 연구를 통해 후생유전학은 획기적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이 갈색 날씬이 쥐의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은 부모가 모두 노란색 뚱보 쥐라는 점이다. 노란색 뚱보 쥐는 어구티 agouti라는 유전자를 보존할 목적으로 번식시킨 종이다. 실험실에서 오늘날 임신 여성이 먹는 비타민 B12, 엽산, 베타인, 콜린 등의 변화를 준 화합물을 섞어 먹여 보았다. 갈색 날씬이 쥐를 낳은 사건이 터지면서 유전에 대한 과학계의 기존 지식을 몽땅 폐기 처분해야 할 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갈색 아기쥐의 유전자가 부모의 유전자와 똑같았다.
어구티 유전자가 '끔' 위치에 돌려놓아져 화학 물질이 그 유전자에 달라붙어 명령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이 유전 억제 과정을 DNA 메틸화라고 한다. 메틸화는 메틸기라는 화학 물질이 유전자와 결합하여 해당 유전자의 발현 방식을 변경하되 DNA는 바꾸지 않을 때 발생한다. 비타민 보충제 성분에는 메틸 공여자가 들어 있다. 메틸 공여자는 위와 같은 유전 멈춤 신호가 되는 메틸기를 형성하는 분자이다. 메틸화 덕분에 얼떨결에 날씬해지고 갈색 털을 얻은 쥐에게는 또 다른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구티 유전자가 있는 쥐는 당뇨병과 암이 많이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어구티 유전자가 꺼진 쥐는 그 부모에 비해 암과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훨씬 낮아진 것이다.
이 최초의 쥐 실험 후에 듀크 대학의 다른 과학자들은 임신한 쥐의 먹이에 약간의 콜린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귀의 뇌에 에너지를 과다 공급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콜린은 뇌의 지역 중추에서 세포 분할 억제를 담당하는 유전자를 꺼 버리는 메틸화 패턴을 유발했다. 세포 분할 통제기가 꺼지자 기억 세포가 대량 생산에 돌입하여 쥐의 기억력이 마이티 마우스 급으로 향상되었다. 뉴런의 발화 속도와 빈도가 높아져 성인이 된 이 메가브레인 쥐들은 미로 찾기 경기의 기록을 모조리 깨버렸다. 과거에도 맞춤형으로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생물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했었다.
물론 후생 유전학 때문에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무용지물이 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에피 게놈지도는 게놈 지도가 없다면 시작할 수 없다. 에피게놈지도 작성 작업은 이미 개시되었다. 2003년 가을 유럽의 한 연구팀은 인간 에피게놈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메틸 표지가 달라붙어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바꿀 수 있는 곳이라면 빼놓지 않고 지표를 추가하는 것이 목적인 이들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 에피게놈 프로젝트의 목적은 DNA 암호의 기능을 제공하는 화학적 변화와 관계를 모두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향후 몇 년 안에 에피게놈 지도가 대부분 작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과학 세계는 결코 만만치 않다.
8. 죽어야 사는 생명의 대원칙
조로증 같은 질병을 감안하면 노화가 사전에 프로그램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즉 노화는 설계의 일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화란 우연인가, 고의인가? 우리는 결국 죽도록 프로그램된 것인가? 레너드 헤이플릭은 현대 노화 연구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960년대 그는 세포가 정해진 횟수만큼만 분열하고 나면 분열을 멈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같은 세포 복제의 한계는 '헤이플릭 한계'라고 하며 인간의 '헤이플릭 한계'는 52~ 60회이다. '헤이플릭 한계'가 생기는 이유는 염색제 끝에 있는 텔로미어라는 유전적 완충 장치가 손실되기 때문이다. 세포 복제가 일어날 때마다 세포 DNA가 조금씩 손실된다. 이러한 정보 손실로 인하여 차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염색체의 끝부분에 보유한 여분의 정보가 바로 텔로미어이다.
그러나 악당 암세포는 염색체 끝부분의 텔로미어를 길게 늘이는 일을 하는 텔로메라아제를 속성 가동함으로써 텔로미어를 빠르게 보충하고, 암세포는 영원히 복제를 계속하게 된다. 또한 건강한 세포가 감염되거나 손상되면 자살 명령에 복종하지만 암세포는 이러한 명령을 무시한다. 줄기세포 역시 '헤이플릭 한계'가 적용되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다. 줄기 세포가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암세포처럼 텔로메라아제를 사용하여 텔로미어를 고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왜 줄기세포가 질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다고 믿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줄기세포는 어떤 세포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절대 지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
잘 알고 있다고 믿어지는 사실들도 끊임없이 보완되고 추가되고 있다. 인류출현에 대한 가설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대초원 가설에 비해 수생 유인원 가설에 따르면 인간의 털이 없어진 까닭은 물속에서 몸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속에 뛰어들 수 있도록 두드러진 코와 아래방향으로 난 콧구멍이 발달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긴 코 원숭이가 그렇다. 긴 코 원숭이도 두 발로 물속을 걷거나 수용을 하는 준수생 생물이다. 피하지방이 없는 고양이 피부와 비교되는, 인간의 지방이 피부에 붙어 있는 이유도 수생 유인원 가설로 설명될 수 있다. 수중 분만의 장점과 물속에서 인간 신생아의 행동을 보면 수생 유인원 이론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생후 얼마 되지 않은 아기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을 뿐만 아니라 물속에서 전진 추진이 가능한 리듬감 있는 움직임을 보인다. 매크로 박사는 아기의 이 물 친화적 행동이 본능에 따른 것이며 생후 4개월이 될 때까지 지속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 책을 계기로 생명은 창조가 끊임없이 진행되는 상태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와 질병의 관계는 종전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건강과 생명이란 혼란으로 끌고 가는 우주의 불가해한 모든 힘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삶의 방향이 바뀐다. 장엄하게 아름답고 정교하게 설계된 지구상 모든 생명체에 대한 깊은 존재의 샘솟는다. 계속되고 있는 기적, 그것은 진화의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