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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당 풍경 2

신입의 침방

by 이용만

10분 거리 동네 사암당 한의원에 진료 번호표를 받으러 새벽 5시에 집을 나선다. 수도권에서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앞엣 여성분 순번이 28번임을 확인하고 아내에게 바로 카톡문자를 보낸다. ‘29번 05시 20분’. 번호표를 뽑는 기계는 없다. 오직 페이스 투 페이스(face to face). 안면과 기억력으로 순번이 정해진다. 새벽 조찬회 참석차 목격했던 롯데호텔 면세점에 젊은 중국인들로 보이는, 길게 늘어섰던 대기줄을 본 적이 있지만, 노인들(주로 할머니들)로 새벽 2시경부터 이만한 시스템이 갖추어진 첨단 매장도 없을 것 같다.

뒷분에게 다음 순번을 인계하다 보면 인사하랴, "저 대신 아내가 올 겁니다, 제가 29번이니 30번이십니다", 군대에서 명령을 수령하고 확인하듯 번호를 복창하는 소리도 낭랑하지만 적어놓지 않으면 쉬 잊는다. 앞엣분이 28번 내가 29번 지금 오신 분은, 그러니까 30번 해가며 두어 번은 확인을 하고 떠난다. "선생님이 29번 내가 30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시고요… "이 과정을 늘 거쳐야 하는데 곱씹으며 외우려들 수록 숫자는 긴가민가해진다. 앞, 뒷분의 인상착의까지 기억하려는 순번이라 소중하기 짝이 없는데 소중할수록 번호가 헷갈리는 건 무슨 까닭일까?

9시 한의원 진료시간 문 열기 1시간 전. 이미 100여 명의 노인분(주로 여성, 할머니라 부르기에는 젊어 보인다)들이 문 앞에 마치 시위대처럼 모여있다. 문이 열리면 자기가 예약된 진료방(10개 중 6번 방이 아내가 원하는 담당 한의사이다)에 도착되었음을 접수시키려는 긴 줄이 순식간에 정비된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이 패턴에 새치기는 금물이다. 지금 접수 중에 지각하여 제 순번을 놓쳤다면, 확인해 줄 앞뒷사람이 없으므로 줄의 맨 끝으로 가게 되어있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다.

사암당 한의원은 완벽한 선입선출, 대량생산 방식의 침공장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러 가지 장점을 체험으로 알게 되면 겉보기처럼 불쾌한 시스템도 아니다. 팔과 다리 같은 말단부위에만 침을 놓는 방식으로 안전하고 단순한 것이 큰 장점이리라. 노화로 인한 불편에도 양의 병원에서는 각종 검사로 데이터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수적인데 비해 이곳은 가성비 최고이다. 예약 횟수는 일주일에 2회 이내로 제한되는 이유도 1,800원인 진료비의 경제성에 있다. 다른 한의원과 마찬가지로 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이 이루어진다. 수요공급의 원칙에 심한 왜곡이 생긴 곳이 이곳 사암당 한의원의 풍경이다.

1번 침방은 신입 한의사와 원장 한의사가 함께 보는 침방으로 호불호가 있어 크게 선호되지 않는다. 신입 한의사를 기피하는 심리가 있는가 하면 원장 한의사의 무게감을 동시에 갖는다. 자신의 주치의 같은 한의사 선생님은 한 명이면 족하다. 불가피하게 당일 대기자로 침을 맞고자하는 때 찾아드는 침방이기도 하다.

대기자로 호명되면 차트를 받은 즉시 침방의 빈 좌석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일등석도 있고 수문장석도 있다. 발침까지 10여분 이상 차이가 난다. 일등석과 말석은 서로 옆좌석이지만 각각 시작과 끝이므로 천지차이다. 코너 네 곳은 침을 맞기 옹색하므로 기피석이지만 예약순서대로 차트가 놓이니 피할 방법이 없다. 다만 대기로 호명되면 그나마 코너를 피해 얼른 자리를 잡는 편이 낫다. 동작이 굼떠서가 아니라 시스템을 모르니 1번 방 코너에 앉아있다. 할 수 없이 침을 맞는 애매한 기분인데 유독 신입 한의사는 새파랗게 씩씩하다. 신참은 어디서나 자리 잡힐 때까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신입으로 살아남으려는 목소리는 크고 말도 많아 정신없을 정도이다.

침 맞는데 불안하니 더욱 찡그리고 긴장하는데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오는 신입 한의사의 속내를 모를 환자는 한 분도 없다. 쥐 나는 것은? 비염 있었는데... 혓바닥 좀 봐요, 사적인 질문을 속사포로 떠들어대며 침을 놓는 것이 보기에 불편하다. 안 아프게 놔요. 아니 아프게 놓으세요. 할머니 한 분이 찡그리면서도 아프게 놓으라는 말은 난해하지만 오묘한 말이다. 유독 무릎 뒤 오금에 침을 넣고 돌리며 깊이를 조절하는데 전기가 찌릿찌릿 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온 정신이 휘저어지지만 몸에 좋을 것 같은, 제대로 침 맞은 느낌의 기묘한 감정이 좋았다.

설사를 한다는 세 살 백이 보미가 엄마 팔에 안겨 침을 맞는다. 아이가 아는 유일한 말인 듯 침놓을 때마다 "아니야아~"라고 울어제낀다. 아이가 토해내는 그 말을 열 번은 들어야 했다. 침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흘러 닦아주면서 "피를 본 날은 좋은 날"이라고 영문도 모를 너스레를 떤다. "잘 맞으시네요"라고 위로의 말을 잊지 않는 것도 노하우이다. 무덤덤한 어르신들은 대답도 않는 경우가 많다. 대신 직원들이 큰소리로 합창하면서 대답한다. 아마 유치원생들에게 어울릴듯한 방식인데 이곳의 성격을 잘 대변한다.

예약할 수 없던 날이다. 새벽미사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사임당한의원에 들러 대기번호를 받았다. 한가할 때 침을 맞아두어야 할 만큼 예약전쟁이다. 이미 대기자리가 없는 6번 방을 포기하고 제2 선택으로 아래층인 3번 침방에 찾아들었다. 이방을 담당한 한의사는 아직 신참이라 예약되지 않은 좌석이 많아 보인다. 이 한의사의 특징은 건강 교육을 쉴 새 없이 해대는 열정이 남다르다. 숨이 찬 증상을 말하려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여하튼 대기번호로 들어온 환자들까지 차트에 메모하고 기억하여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힘은 젊음에 있을 것이다.

3번 침방은 내게 공포의 침방이었다. 왼쪽 오금에 침을 넣고 휘젓는데 묻는 말에 대답하랴 찔끔하며 맞는 침이다. 특히 오금부위는 깊이 찔러 넣고 찌릿하는 전기신호가 감지될 때 공포스러웠다. 건너편에 마주 보는 아주머니는 내 모습에 웃음을 참는다. 같은 침을 같은 부위에 놓는데도 침을 놓는 이에 따라 공포감이 다르다. 오늘 침을 맞은 오금으로 왼발전체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옆 아주머니는 침을 맞기도 전에 얼굴을 감쌌고 급기야 한의사는 "아직 침은 놓지도 않았어요" 하며 좌중을 웃겼다.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 치마로 얼굴을 가렸을까? 젊은 할머니는 심청의 모습으로 오버랩되니 공포스러운데, 사랑스러운 공포라고 말하더라도 침방에 앉은 분들은 모두 덕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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