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여행엔 부엌만 없으면 돼

끼니 해방

by 그래용

결국 내가 원했던 건 내가 차리지 않은 밥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푸꾸옥에 머물 예정이었던 6일 중 4일간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다. 남편이 절망하고 있을 때 "난 비가 와도 상관 없어! 6일 동안 밥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라고 말했다. 내가 밥 하는 게 싫다고 하니, 남편은 돈 벌기 싫다고, 수안이는 유치원 가기 싫다고 연이어 말해 한바탕 웃었다. 다들 자기 역할에 지쳐있던 게다.


먹고 사는 일에만 치중하면 짜증이 는다는데 딱 그 시점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어른이고 아이고 아등바등 살아왔다. 어느 날은 잠에 들 때 오늘도 가까스로 살았구나 생각된 날도 있었다. 인생을 버틴다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데 버티는 날이 허다한 게 사실이었다. 남편이 있는 날엔 영양을 고루 갖춘 음식을 차려주는 데 에너지를 쏟았고, 남편이 없는 날엔 두 아이와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우리는 떠났다. 비행기에서 나오는 기내식도 맛있게 느껴지는 걸 보며 남이 차려준 밥이 맛있는 아줌마가 다 되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성실히 남이 차려준 밥을 6일 내내 먹었다. 혹시 몰라 챙겨 갔던 햇반, 김, 누룽지, 컵라면을 돌아올 때 고대로 가져왔다. 남이 차려준 밥 충분히 먹었더니 다시 밥 차릴 힘을 얻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이들과의 완벽한 여행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