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디렉터스 컷)>, 타셈 싱, 2006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디렉터스 컷 - 타셈 싱] 어떤 추락은 구원의 시작이 된다.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과 <애프터 썬>은 모두 '기억의 편린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과정'을 통해 인물의 내적 성찰과 구원을 그려내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감각적 경험(색채, 소리, 촉감)을 서사 진행의 핵심 도구로 활용해 관객의 공감각을 직접 자극하는 전략을 취한다.
두 작품이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재구성’을 통해 과거와 대화하는 현재를 담아내고 있으나, 이를 다른 접근법으로 풀어낸다는 것도 비교하며 볼만 한 요소가 된다. <더 폴>이 상상력을 통한 적극적 치유를 강조한다면 <애프터 썬>은 기억의 부재와 이해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오는 애틋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애프터 썬>은 현재의 상상력의 결과를 조명하면서도 그것이 세월에 따라 바랜듯한 연출을 하고 있다면, <더 폴>의 화룡점정은 타셈 싱 감독의 광고 연출 경험이 녹아든 강렬하고도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에 있다.
본작을 관통하는 청각적 요인을 하나만 꼽으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7번 가장조, 작품번호 92의 제2악장 알레그레토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알레그레토 위에 타셈 싱의 광고 연출 경력이 빚어낸 시네마틱 알레그레토가 겹쳐지며 영화 언어의 전달력은 극에 달한다. 카메라가 천천히 내려앉는 오프닝 숏. 병원 천장의 금이 간 타일이 마치 악보의 가로줄처럼 펼쳐진다. 광고 감독 출신의 타셈 싱이 11년간의 제작 기간 동안 28개국을 누비며 수집한 이미지들은, 90분짜리 CF처럼 치밀한 리듬감으로 관객의 시각적 갈증을 해소시킨다.
영화 속 알렉산드리아의 상상력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트라우마와 상실을 직면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자 자기 치유의 과정으로 읽힌다. 파편화된 기억을 감각적 이미지로 재구성하며 고통을 '이야기화'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트라우마 극복의 서사가 된다. 이는 로이의 자살 충동을 막기 위한 알렉스의 몸부림이 동시에 자신의 아버지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중첩되는 이중성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더 폴>의 거대한 판타지 세계관은 결국 '서로를 구원하기 위한 이야기 만들기'라는 미시적 행위의 확장이다. 타셈 싱은 이러한 메타 서사를 초현실적 이미지(흰 천, 코끼리, 사막)로 구현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의 힘'이 현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한다. 본작은 감각적 영상미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서사 구조 자체와 유기적으로 결합한 대표적 사례, 그 자체다.
결과적으로 본작은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넘어, 인간 정신의 복잡한 층위를 탐구하는 도구로서 영화가 갖는 가능성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특히 "추락(fall)이 구원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 해석, 작품의 제목이 지닌 이중적 의미(몸의 추락/정신의 타락)를 넘어선 제3의 해석이 가능한 것은 본작이 비주얼적으로 갖는 가치 그 이상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이의 눈을 빌어 관객으로 하여금 추락과 구원, 본작을 둘러싼 현실적인 환경에 대하여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관찰이 가능하도록 함과 동시에, 아이의 입장에서 문제 해결 상황에 몰입하도록 장치한 것도 인상 깊다. 알렉산드리아의 상상력은 모래시계처럼 수직으로 쌓인 사막을 가로지르고, 영상 프레임이 모래알처럼 관객의 망막에 박히는 순간, 어린아이의 동공으로 세계를 삼키기 시작한다.
카메라 앵글이 점차 낮아지며, 성인 남자의 시선 높이 - 휠체어 앉은키 - 병상에 누운 눈높이 - 바닥에 떨어진 약병 옆에서 찍은 초저각으로 변화하는 흐름도 관객이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에 이입하여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나가도록 유도한다. 관객은 9세 소녀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데에서 나아가, 9세 소녀의 척추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타셈 싱이 28개 장르의 회화 스타일로 재현한 화면들은, 사실 한 소녀의 망막에 새겨진 감각적 각인에 다름없는 것이다.
영화의 첫 프레임과 마지막 프레임이 정확히 같은 병실 천장의 금을 포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해한다. 이 여정이 사실은 추락(fall)의 순간에 정지된 시간 속에서 펼쳐진 정신의 항해였음을.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엮은 이야기가, 관객의 틈새에도 스미는 순간, 본작은 새로운 fall을 위한 준비 운동이 된다. 관객은 떨어진 준비가 된 채로, 연고를 들고 영화관을 나서는 셈이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의 기나긴, 지지 않는 론도. 생(生)은 아마도 거대한 알레그레토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얄따란 경계 위의 존재, 그 자체. 추락, 낙하. 깊고 어둑한 심연에서 만나는 의외의 위안. 그것들이 오선지 위에 수없이 쏟아지는 서로 다른 음표들과 섞여 춤추며, 거대한 변주곡을 이뤄내는 것.
멀리 보이는 환상의 문을 향해서, 코끼리 위에 앉아 바다를 건너고, 말을 타고 바위산에 오르며, 천천히. 떨어지고 부딪혀도 다시 오르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긴 사막을 걷는 것. 그리고 서로 얽혀 사방을 울리며 굽이치는 그 긴 교향곡(사귈 교 交, 울릴 향 響, 굽을 곡 曲, symphony)이야말로. 불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