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디렉터스 컷)>, 타셈 싱, 2006
(요약)
추락, 낙하. 그 끝 모를 진행형에서. 스치듯이 만난 사람들이 이야기를, 우주를 만들어 올리고,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며, 나아가 서로를 구원하는 모습을 그려낸 대서사시.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의 기나긴, 지지 않는 론도. 생(生)은 아마도 거대한 알레그레토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얄따란 경계 위의 존재, 그 자체. 추락, 낙하. 깊고 어둑한 심연에서 만나는 의외의 위안. 그것들이 오선지 위에 수없이 쏟아지는 서로 다른 음표들과 섞여 춤추며, 거대한 변주곡을 이뤄내는 것. 멀리 보이는 환상의 문을 향해서, 코끼리 위에 앉아 바다를 건너고, 말을 타고 바위산에 오르며, 천천히. 떨어지고 부딪혀도 다시 오르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긴 사막을 걷는 것. 그리고 서로 얽혀 사방을 울리며 굽이치는 그 긴 교향곡(사귈 교 交, 울릴 향 響, 굽을 곡 曲, symphony)이야말로. 불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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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모든 존재는 과거의 그가 가지고, 누리고, 경험한 순간들의 총체다. 감사하게도 나는 또래보다 어린 딸을 키우고 있었던 엄마 아빠가 이미 철저한 경험주의자였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활동을 선택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현재 나의 감수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감각적 경험들이다.
가족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색채와 바다의 짭쪼롬한 냄새, 산의 푸르른 향기. 백사장이 발바닥에 닿을 때 새살이는 듯했던 간지러움, 아빠가 겨드랑이에 큰 손을 넣어 들어 올릴 때 느꼈던 짜릿함.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하면 엄마가 눈을 감고 손끝으로 박자를 맞추며 내던 딱. 딱. 딱. 소리. 루나의 머리통이 깨졌을 때 선연했던 핏자국. 달리는 발걸음 소리.
토끼 귀의 가슬가슬하고 서늘한 감촉. 가족 나들이 때 하마가 방구를 뀌어서 온 동물원에 진동했던 냄새. 치토스를 와그작하고 씹었던 감촉. 루나의 눈을 들여다보면 까만 눈동자에 어른거리던 나의 모습. 어릴 때 어떤 것을 배우고,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거기에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감각에서 오는 충격은 생생하다.
사유(생각思, 생각할惟)는 흐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이유는 우리 뇌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고, 3초에 1개씩 떠오르는 새로운 생각 모두를 우리 뇌에 저장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기억해야 할 것을 선별하고 그 안에서도 핵심적인 가치를 뽑아 저장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그러나 신은 대체로 공평해서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촉감으로 닿아, 감각적으로 느낀 것만은 선별하지 않고도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물론 감각으로 남는 것도 대개 강렬하거나 중요한 것들이지만 유효기간과 범위는 사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다. 유년시절 타인과 나눴던 대화나 거기에서 깨달은 바는 기억나지 않아도 감각은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다.
CF 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타셈 싱이 <더 폴>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짧은 시간 내에 소비자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는 서사와 멘트, 설득력을 견인하는 비주얼과 음향의 조화라는 성공적인 광고영상 제작의 공식을 본작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서 온다. 감각의 강력한 영향력. 본작은 오감의 강한 영향력을 이용해 사랑과 연대(잇닿을 연 連, 띠 대 帶)에 대한 감독의 사유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고, 보고 지득한 것을 토대로 상상한다. 이야기를 듣는 알렉산드리아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이미지화하면서 주변인의 모습을 이야기 속 인물에 투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관객이 ‘엿보고 있는’ 모든 놀라운 장면들은 사실, 경험이 얕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어린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극적인 경험 자체를 업으로 삼고 있는 스턴트 배우인 로이의 상상력을 따라잡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경험을 총동원하여 재현한, 그러니까 철저하게 알렉산드리아의 상상이다. 결국 본작은 한 아이의 관점 그 자체를 엿보는 것과 같다.
타셈 싱은 아이의 상상력을 강렬하고 보통의 인간이 직접 겪기 어려운 수준의 공감각으로 그려내지만, 현대 관객의 직간접적 사회 경험은 아이의 눈높이와 경험치를 상회하므로 아이의 상상력과 감각적 경험을 담은 화면을 하나하나 공감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끝없는 사막 가운데에 걸려 있는 커다란 흰 천은 현실에서 보통의 관객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스크린 위에서의 묘사는 물론 압도적으로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공감할 수 없는 장면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상상력과 상상력을 통한 감각적 경험에 공감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알렉스가 이야기에 등장한 자상한 아빠들을 하나씩 잃는 장면들이 그렇다. 다섯 용사들은 시각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지켜보는 이에게 충격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 죽음에 순간에서야 그들을 지옥에 밀어 넣은 것은 복수(회복할 복 復, 원수 수 讐)의 정념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였음을 깨닫는다. 진짜 구원은 자신 안에 있고, 진짜 용기는 용서에 있었음을. 알렉스 또한 용사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이를 깨닫고, 아빠의 죽음을 떠올리며 확신하며, 로이에게 소리 지른다. “Daddy, let him live.” 알렉스와 함께 죽음의 장면에 충격받고, 상실의 아픔을 겪었던 관객은, 알렉스의 깨달음도 온전히 함께 한다.
본작의 이런 흐름, 아이의 기억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통해 이야기를 완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관통하지만 잊고 있었던 영영 얻지 못할 뻔했던 깨달음을 끝내 얻는다는 골자의 주요 플롯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메시지의 조화는, A24 작품으로 샬롯 웰스가 감독을 맡았던 <애프터 썬>을 떠올리게 한다. 30살이 된 딸 소피는, 현재 자신과 같은 나이었던 아빠가 11살이었던 자신을 데리고 튀르키예로 여름휴가를 떠났던 과거를 추억한다. 소피는 비디오카메라에 기록된 두 사람의 모습들을 토대로 과거를 회상하지만, 카메라가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은 세씬 정도에 불과하다. 소피는 대부분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추정으로 채운다.
결국 <애프터썬>을 관람하는 경험 역시 본작과 마찬가지로 소녀의 기억을 토대로 아빠의 나이가 된 장성한 딸이 상상력으로 행한 ‘헤아림’의 결과를 엿보는 것과 같다. 관객은 두 부녀가 따사로운 햇살과 청량한 윤슬 속에서 서툴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모습, 소녀가 바라봤던 위태로운 젊은 아빠의 이미지, 그리고 젊은 아빠와 같은 나이가 된 늙은 소녀가 아빠에게 보내지 못하는 위태로운 공감을 함께 보고 듣고 겪으며, 소피가 깨달은 바도 함께 깨닫는다. 거대한 우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끝없는 터널.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둬버린 작은 댄스홀. 그를 그 심연에서 구해낼 수 있는 것은 그 자신뿐이었음을. 그리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자신뿐임을.
때문에 본작이나 <애프터썬>과 같은 작품이 뛰어난 비주얼을 위시한 뛰어난 전달능력을 갖췄음에도, 메시지 자체와 스토리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다는 평가에 반대한다. 영화라는 매체적 특성상 감각적 심상이야말로 그 자체로 개연성, 스토리, 메시지로 기능한다. 추락, 낙하. <더 폴>은 그 끝 모를 진행형에서 스치듯이 만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두 사람만의 우주를 만들어 올리고,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나아가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을 그려낸 대서사시다. 나아가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들려주는 대서사시를 그림으로써 작품 자체가 대서사시가 된다는 점에서, 외피와 내용물의 일치감을 이룬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는 각자 추락(fall) 사고로 같은 병원에 입원한다. 사고의 세부 경위는 다르지만,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받고 싶어서, 높은 곳에 간신히 매달리다 떨어졌다는 점에서, 두 영혼이 겪은 떨어짐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첫눈에 상대의 아픔을 알아본다. 알렉산드리아는 자신이 동경하는 간호사에게 편지를 쓰고 창문 밖에 있는 그녀에게 던지지만, 편지는 엉뚱하게도 창문으로 떨어져(fall) 창문가의 침대에 누워있던 로이의 수중에 들어간다.
알렉스는 자신이 쓴 편지를 읽고 있는 로이를 발견하고, 로이가 편지를 낙서라고 부르며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그에게 "I didn't write for you."라고 일갈한다. 이는 본작 초반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에 대하여 취하는 배타적인 마음가짐을 함축한다. 로이 역시 알렉산드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로, 밝혀지건대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꼬드겨 모르핀을 훔쳐오게 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컨대 서두에 선 둘은 그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타인의 이야기와 마주한다.
그러나 로이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야기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것, 서로를 향한 것, 서로를 다독이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긴 서사시에 자신의 역사와 마음을 조금씩 엮어내게 되고, 이 환상적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자 상대의 마음을 안아주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다른 우주와 면밀하게 경계를 접하고(fall), 이야기의 표면에 비치는 서로의 맑은 얼굴을 향해 빠져든다(fall).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태도가 "I don't want to get better, cuz I wanna stay with you forever.", "It (this whole story) is mine, too."를 거쳐, 종국에는 "She(알렉산드리아) loves you(로이)."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축약된다. 결국 모든 것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다.
로이와 함께 했던 네 명의 용사가 모두 전사(fall)하고, 여정은 멸망(fall) 앞에 선다. 로이는 패배(fall)감에 젖어 반격을 포기하고 연못 바닥에 처박힌다.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에게 "Daddy, Get up! Please let him live."라고 절규하고, 다음 순간 로이는 구원받는다. 그는 알렉스의 사랑을 통해, 사랑받기 위해서 떨어지고 부딪혀도 기어오르며(falling, hitting, and climbing), 경계 위에서 위태로웠던 자신을 살게 하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애써온 자신을 안아주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닫는다. 알렉산드리아는 자신을 진정으로 아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로이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 모든 추락에서 자유로워진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어야 했던 아버지를, 아버지를 지키지 못해서 괴로웠던 어린 자신을, 비로소 구원한다. 감각은 강렬하다. 그리고 오래 살아남는다. 사유는 고요하게 흐른다. 그러나 영원하다. 생 앞에서 똑같이 어렸던 알렉스와 로이는 그들이 이야기를 통해 성장하면서 깨달았던 것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사랑하는 마음뿐이며,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복수심에 불타 오디어스를 내려치던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의 "Stop the fight!"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알렉스를 안고 떠나고, 홀로 남은 오디어스는 자신의 칼에 심장이 꿰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는 우연에 기댄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이라기보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가 용기 내어 그를 용서함으로써 이 거대한 전투에서 승리했고, 오디어스는 패배했음을 암시한다. 오디어스가 자신의 패배를 죽음으로 갚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에게는 어떤 사랑도 없었고, 타인을 해(害)하는 것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알렉스와 로이, 희한한 짝꿍은 나란히 앉아 로이가 나오는 영화를 관람한다. 그리고 헤어져 각자 과수원으로, 촬영장으로 돌아간다. 아마도, 기가 막힌 짝꿍은 남은 생 내내,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내내 로이가 나오는 장면들을 헤아린다. 떨어지고, 부딪히고, 다시 기어오르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falling, hitting, and climbing, going up & down을 반복하면서, 로이 또한 자신이 가장 아래로 추락했던 시절에 만난 알렉산드리아를, 한참 생각했을 것이다. 감각은 오래남는다. 사유는 영원하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불멸의 존재로 누군가에게 남는다.
또한 본작이 평면적인 이야기를 구사한다는 평가에도 동의할 수 없다. 본작은 메타포를 복잡하게 설정하고 구조화시킨 후, 동화를 연상케 하는 단순한 이야기와 감각적 스타일링을 덮어, 가볍게 즐길 수 있도록 의도한 결과물로 보인다. 예컨대 새, 이빨이 순수하고 다정한 영혼을 표상하는 점이 그러하다. 알렉스는 로이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주술사 역할에 ‘겁이 나면 어른도 쉬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상하게 대해 준 틀니 할아버지를 캐스팅한다. 주술사가 죽자 입에서 새들이 쏟아져 나온다. 로이와 알렉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상상 속에서 새들로 현화(현실 현 現, 될 화 化) 시킨다. 할아버지가 죽자 틀니만이 덩그라니 남는다. 밤에는 빼고 낮에는 다시 입에 넣어 끼워져, 다정한 위로를 전했던 것. 알렉스는 새들을 생각하며, 할아버지의 이빨을 오렌지 껍질에 고이 담아 심는다. 그럼 나무가 자라, 주술사가 나무에서 나올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는 아이가 아는 몇 안 되는 다정한 마음이 세계에서 영영 지워지는 게 슬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이빨이 오렌지 나무로, 새로, 주술사로, 다시 태어나 무언가 이야기해 주길 바랐는지도.
본작은 색채를 중심으로 주로 이미지에 중점을 두고 감각을 자극하며 전개된다. 그러나 시각만큼 청각 또한 감상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본작을 관통하는 청각적 요인을 하나만 꼽으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7번 가장조, 작품번호 92의 제2악장 알레그레토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은, 프러시아계를 압도하면서 진군한 나폴레옹 때문에 후원자였던 루돌프대공이 몸을 피하면서 자금 후원이 끊겼다는 현실적, 정치적 이유와 무엇보다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이나 나폴레옹이 통치의 방식으로 선택한 방법론으로의 압제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있다는 신념 때문에 나폴레옹을 경계했다. 자유, 평화, 사랑만큼 소중한 가치는 없다는 베토벤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다. 본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베토벤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본작의 테마로 알레그레토를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라고 하겠다.
특히 제2악장 알레그레토는 교향곡 7번 중 유일하게 단조로 구성이자 가장 느린 속도로 설정되어 있다. 7번을 관통하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덜하여 음울하고, 현악기가 제시하는 주제가 악장 내내 완고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안단테와 알레그로 사이에 낀 조금 빠르게의 자리는 좁고 위태위태하다. 제2악장은 호른과 목관이 시작을 알리는 순간에도, 단조의 현악기 선율이 침통한 오블리가토에 얽혀 소리를 쌓아가는 중에도 여전히 음울하다. 그러나 점차 풍부한 화성을 추가해 가며 심연에 침잠한 저음을 극복하고, 비장함마저 맴도는 우울한 춤곡 위에 모든 악기에 의해 포르테가 쌓이면서 희망과 위로를 노래하는 애가(슬플 애 哀, 노래 가 歌)가 완성된다. 본작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알레그레토가 반복된다는 점 자체가 알레그레토와 비슷한 구성을 보이며, 본작의 전개 후반부에서 모든 인물들의 사연들이 포르테로 쌓이면서 위안을 준다는 점도 알레그레토와 비슷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2악장은 느린 박자로 울적한 분위기를 쌓아 올려 청중을 압도하면서 발표 당시 가장 큰 지지를 받았고, 슈만과 바그너가 장시간 추종(좇을 추 追, 좇을 종 從)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바그너가 제2악장을 불멸의 알레그레토라고 명명했다.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불멸의 알레그레토는 딥 퍼플의 <exposition>에 샘플링되거나, <엑스맨 : 아포칼립스>에 배경음악으로 삽입되는 등, 특유의 애수에 찬 어두운 분위기나 추락과 위로가 엇갈리는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삽입곡으로 쓰이고 있다.
아, 그러니까 알레그레토가 불멸이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와 로이, 다섯 용사들의 모험은 어쩌면 불멸이 되지 않을까. 감각은 오래 남는다. 그러나 사유는 영원하다. 그리고 이야기는 불멸한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의 기나긴, 지지 않는 론도. 생(生)은 아마도 거대한 알레그레토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얄따란 경계 위의 존재, 그 자체. 추락, 낙하. 깊고 어둑한 심연에서 만나는 의외의 위안. 그것들이 오선지 위에 수없이 쏟아지는 서로 다른 음표들과 섞여 춤추며, 거대한 변주곡을 이뤄내는 것. 멀리 보이는 환상의 문을 향해서, 코끼리 위에 앉아 바다를 건너고, 말을 타고 바위산에 오르며, 천천히. 떨어지고 부딪혀도 다시 오르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긴 사막을 걷는 것. 그리고 서로 얽혀 사방을 울리며 굽이치는 그 긴 교향곡(사귈 교 交, 울릴 향 響, 굽을 곡 曲, symphony)이야말로. 불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