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봉준호, 2025
[미키 17 - 봉준호] 견딘다는 말의 무게
먹고 산다는 일은 곱씹을수록 질겨진다. 뒷걸음쳐도 코앞으로 밀어닥치는 것이 현실이다. 이자를 내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봐도, 끝내 오늘은 빚처럼 견뎌야 할 것으로 남는다. 그렇게 질기고 무거운 일을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유일한 사람을 지켜낸다는 것. 그 일상적이면서도 위대한 기적에 대한 이야기.
<아바타> 같은 작품은 alien(외부인, 외국인, 외계인)과의 접촉을 묵직하게 그리는 반면, 본작은 타인과의 접촉을 캐주얼하게 그리면서도, 상생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굳이?' 혹은 '이것도 위트야?'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감독님 특성상 반드시 해야 할 말만으로 이야기를 엮지는 않기 때문에 이해할만한 정도라고 느꼈다.
가장 인상 깊은 설정은 Print였는데, 프린트라는 어휘만으로도 인간의 신체는 똑같이 구현해 낼 수 있지만 영혼까지는 복사할 수 없다는 점을 표상한다는 점이 탁월하다고 느꼈다. 프린트는 논리적으로 존재를 설명하기 어려우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영혼, 정신과 같은 관념을 복사할 수는 없다. 여전히 영혼과 정신의 정의와 존재유무는 미궁 속에 있지만, 17과 18이 서로 전혀 다른 인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이 설정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기억의 총체가 똑같아도 서로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설득력을 지닌다. 본작에서 묘사하는 프린트라는 행위와 그 결과는 인간의 텍스트(서사, 기억)를 인쇄(프린트)하는 것만으로는 인간 자체를 복사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제된 17과 18은, 기계의 부품처럼 상호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전혀 다른 존재라는 접근이 가능하다. 봉준호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를 논설하기보다는, 조부모가 손주에게 이야기하듯이 이야기로 조각조각 풀어낸다.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크리퍼의 존재 의미도 기억에 남는다. 그들이 엄청난 고등생물이어서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거나, 인간을 한 번에 몰살시킬 수 있다는 추론은, 크리퍼가 생존을 위하여 선택한 블러핑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고등생물인지가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관객은 마지막 순간에야, 인간보다 능력적으로 고등하지도 또한 열등하지도 않고, 인격적으로 고매하지도 혹은 저열하지도 않은 생명체들에 대하여, 겉모습에 의지하여 여러 차례 예단하고 있었음을 인지한다.
몇 가지 끔찍한 설정 중 첫 번째는 미키 2~17을 프린트하는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더 이상 미키라는 존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고, 매너리즘에 빠진 상태로 윤리적으로 쉬이 해이해졌다는 점이다. 4년간 우주선에 갇혀 있고, 익스펜더블의 존재 의미가 타인의 생존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에 있을지라도 이런 종류의 도덕적 해이는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구성원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이들이 누군가의 생명은 경시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도 있을법한 이야기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흐름이 연구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확산되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공포스러울 일이다. 두 번째는 케네스와 일파, 일약 마샬부부의 통치논리다. 그들은 순백의 세상을 기치로 두고 그들만의 성전, 그들만의 교회를 지으려 하지만 그 본질(sauce or source)은 여전히 조미료 덩어리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일파는 본작 내내 소스무새로 활약하며 소스야말로 문명 발달의 척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마샬 부부의 첫 연설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열량(kcal)을 인질 삼아 선내 성관계를 억제하고, 반대로 니플하임에 정착 후에는 번성을 목적으로 하는 자유로운 성관계를 적극 장려하겠다고 공약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통제한다. 이는 과거에 스포츠, 성관계, 스크린을 내세워 정치적 불만을 환기하려는 배기 정책을 떠올리게 하며, 도파민 의존으로 축약되는 현대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과도 연관이 있다. 일파가 소스에 집착하는 것은, 그녀에게 소스가 재료의 본모습을 흐리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문명의 발달이라는 허울로 그들 부부가 니플하임에서 해내려는 음모를 가리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반적으로 본작이 <돈룩업>과 같은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블랙 코미디들을 떠올리게 하고, <설국열차>, <옥자> 등의 감독의 전작과 겹쳐 보이는 점은 사실이고 아쉽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 새롭기만 할 수는 없다. 여전히 본작은 미키라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인가.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미지의 외지인과 계속해서 조우해야 하는 세계화 시대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 크리퍼는 정의로운 존재인가(함무라비 법전을 생각나게 하는 마마 크리퍼의 조처는 과연 정의로운가). 같은 사유는 기본적인 것이지만 해볼 만한 사유들이다. 또한 아침마다 YTN을 틀어놓고 세계의 독재자들을 지켜봐야 하는 현시점에서 꽤 시의적절한 이슈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본작은 우리가 우리라는 존재를, 삶의 무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생각할수록 괜찮은 작품이 될듯하다. 미키는 카이처럼 친절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과 함께 여러 번의 죽음과 고통을 함께 견뎌준 나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미키 18과 사랑에 빠지고, 흔들릴지라도. 빚과 그에 붙은 이자만 우리를 찾아오는가. 오늘은 어제의 카르마가 한 겹 더 쌓여있다. 내일은 오늘의 카르마가 한 겹 더 쌓인 채로 문 앞에 배달될 것이다. 그런 매일을 우리는 내내 견디기만 할 것인가. 누군가가 함께 견뎌준다면, 내가 누군가와 함께 견뎌준다면. 우리가 견딜 내일은 오늘보다는 덜 무거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은 어느 날 아침엔가, 문 앞에 배달된 오늘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내게 만드는 것일지도.
사랑의 창궐. 나 때문에 이성을 잃은 첫 번째 사람. 날 위해 화내준 사람. 같이 견뎌준 사람. 나조차 이해 못 하는 나를, 모든 나를 이해해 준 사람. 익스펜더블로서의 자신을 견뎌내던 미키 17이, 미키 반스로 오늘을 살아내게 된 것은. 행복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한 것은. 어떤 이에게는 붕괴였고,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었던, 사랑일지도 모른다. 얼음행성에도 봄이 온다. 그저 착륙했을 때 겨울일 뿐이었던 것이다.
메모지 챙겨가는 것을 깜빡한 바람에.........
팝콘 콤보 먹으면 그 맛 나눌 때 쓰는 깍대기(?)에 메모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주 주말이면 사라지는 송파 cgv에서.
영화관이 사라진다는거는 인연의 깊이를 떠나서 늘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