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맞는 옷

<F1 더무비>, 조셉 코신스키, 2025

by 새벽녘 연필소리

[F1 더무비 - 조셉 코신스키] 딱 맞는 옷

예전에는 지인들이 출산하면 자녀가 입으면 딱 맞을법한 옷들을 선물하고는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생각보다 정말 금방 커서, 내가 선물한 옷은 금방 작아져버리고는 했다. 나와는 14살 차이가 나는 우리 집 막내가 유치원에 다녔을 때, 막내랑 같은 반 친구들을 보면 막내가 상대적으로 너무 몸집이 작아서, 걱정이 많은 엄마 몰래 막내의 작은 체구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했다(걱정이 많은 성향도 유전되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막내는 9월생이고 남자아이라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은 한 달 차이로도 체격에 큰 차이가 나고, 여자애들이 조금 더 빠르게 성장하며, 바꿔 말하면 갈수록 내 동생도 빨리 자랄 것이었다. 역시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훌훌 자랐고, 남자아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터프하게 자란 누나들이 물려준 옷이 딱 맞다가도 금세 작아져 못 입게 되었다. 지금은 기성복으로 정장을 맞춰도 수선이 필요 없는 어엿한 성년이 되어, 누나들은 그 애 눈을 보려면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게 됐다. 그 성장이라는 섭리를 눈치챈 이후에는 아기들을 위한 선물로 옷을 준비할 때, 성장의 여지를 생각하며 조금 큰 옷을 준비한다. 아기가 자라도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톰 크루즈의 비행기는 하늘을 날고, 브래드 피트의 레이싱카는 트랙을 달린다. 포메이션 랩에서 예열된 바퀴만큼 인기가 뜨거운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늘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영화를 ‘좋은 기회가 오면’ 보는 이유는, 미디어의 힘 때문이다. 숱하게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볼이 불그스름한 4살 배기 아이도 부모의 눈보다 아이패드와 더 자주 눈맞춤한다는 사실을. 그것이 비단 IT 강국인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배웠다. 즉슨,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한 인간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정립되는 모든 순간에 근거리에서 영향력을 미친다. 그 인간은 성장하여 사회에 편입되어 미디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화하는 주축으로 역할한다. 탑건이 사회에 미친 강력한 영향력을 직접 겪은 그와 제리 브룩하이머가 미디어의 영향력에 대하여 모를 리 없다. 모른다면 그들의 사회적 공감능력이나 감수성을 의심해야 한다. <탑건 오리지널>이 개봉했을 때, 미군은 작품을 ‘프로모션’에 활용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을 때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호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건: 매버릭>에 이어 <F1 더 무비>에서도 아시안 배우가 통편집되는 일이 발생했다. <탑건: 매버릭>의 아시안 배우는 똑같은 강도로 훈련을 받았으나, 자신의 분량이 모두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회장에서 알았어야 했다. <F1 더 무비>의 인도인 여성 배우는 작품에서 두 번째로 비중이 높은 JP와 러브라인을 형성하는 역할을 맡아 작품 내 비중이 상당했고, 작품 프로모션 기간에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최종 편집본에서는 대사 한 줄도 없이 편집됐다. 설령 일련의 사건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해도, 이런 의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심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만든 작품은 꼭 봐야 하는 대상에서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이런 이유로 <탑건: 매버릭>은 시사회 티켓이 생겨서, 본작 역시 티켓을 제공받아서 관람하게 됐다.

뒤늦은 관람평이지만, 이 모든 풀리지 않는 의혹과 찝찝함에도 불구하고, 오락영화로서 본작의 흥행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본작은 영화와 레이싱이라는 매체, 소재적 특성의 본질에 충실하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돌비 애트모스 4k라는 강력한 하드웨어 덕도 있겠지만, 영화는 체험형 작품으로서 오로지 관객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집중력을 F1 그랑프리의 현장감을 재현하는 데에 쏟아붓는다. 레이서를 중심으로 캐스터, 피트 안팎의 엔지니어, 디자이너가 어떻게 게임을 운용하는지 자세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표현한다. 제리 브룩하이머와 조셉 코신스키의 영화답게 주인공(주로 백인이고 남성이며 미국인인)이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며 방황하다, 타인, 단체, 더 큰 단체, 나아가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며 필생의 목적을 실현시킨다는, 뻔하고도 완전히 예측가능한 이야기를, 예상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면서도 여전히 박진감이 넘친다.

맥거핀과 복선을 활용하지만 스토리라인은 거의 정확히 예측이 가능하다. 소니가 우승한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그의 유니폼 오른쪽 팔 부분에는 스페이드 7이 새겨져 있다. 스페이드 7은 하지 말거나 내려놓는 것이 좋다는 의미를 지닌 카드로, 장애물이 나와서 실패함을 암시하는 의미를 가진다. 스페이드 7이 불길함을 조성하는 가운데, 설상가상 소니의 시력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베가스에서 소니와 케이트가 나누는 대화에서 소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나만 남아 있을 때, 나는 나는 것 같이 느낀다며, 그때만을 기다린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로써 관객은 그에게 사고가 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도, 결국엔 그가 경기 후반부에 날아올라 승리할 것임을 무리 없이 예측할 수 있다. 애초에 본작은 <포드vs페라리> 같은, 르망 24를 무대로 하는 레이스를 배경으로 실화를 그려내면서도, 사실은 포드와 페라리가 서로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각자의 한계와 생애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과정을 레이스에 비유하는, 철학적으로 자아를 성찰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때문에 본작은 입체감 있는 인물과 깊이 있는 서사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와 레이스라는 소재가 갖는 두 가지의 오락적 본질을 결합시켜 풀어내는 것을 플랜 C, 주인공이 구사하는 것 같은 combat 전략으로 삼는다. 에이펙스 팀이 combat을 연호하는 장면, 소니(브래드 피트 분)의 가면을 쓰고 그의 이름을 외치는 팬들을 집중 조명하는 장면 등이 작위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용인되는 범위 내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영화의 목적이 관객이 극 중 인물의 상황을 직접 체험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유도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본작은 상술한 목적을 이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운드를 예술에 가까운 경지로 구사한다. 한스짐머, 퀸, 돔돌라, 로제, 도자캣, 에드 시런의 사운드는 각각 그 자체로도 훌륭하고, 각 신과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며, 특히 레이싱 장면에서 사운드 효과와 리듬적으로 맞물린다는 점에서 극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러나 본작에서 음악은 극의 흐름에 맞춰 병렬한 상태에서 제일 큰 빛을 발한다. 단순히 장면에 어울리는 것을 넘어 서사와 나란히 달리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연출의 뛰어난 역량이 증명된다. 본작은 돌아온 탕아이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레이서 소니가, F1 신의 신예이자 자신의 예전 모습을 너무 닮은 JP(댐슨 이드리스)를 이끌어주고, 킹메이커로서 JP의 성장을 뒷받침하고 팀의 단합을 이끄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JP의 실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직면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도 성숙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컨대 구세대와 신세대가 함께 성장하고, 세대 간의 화해와 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룩하는 이야기인데, 음악의 배열에서도 이 점이 조명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한스짐머의 사운드와 영국 그랑프리에서 울려 퍼지는 퀸의 <we will rock you>가 구세대와 클래식한 감성, 그리고 8~90년대의 유쾌한 반항을 보여준다면, 에드시런, 돔돌라, 로제, 도자캣 등 다양한 장르에서 현대 세대를 대변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이 새로운 세대가 서킷 위를 달릴 차례임을 상기한다. 배우들과 캐릭터들의 나이 차이뿐만 아니라, 레이싱을 이루는 모든 것, 문화와 기술, 심지어 선수들의 자기 단련 과정 등 다층적 요소까지 함께 어우러져, 동반 성장과 화해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세 번째, 평면적이고 예측 가능한 캐릭터가 가지는 한계를 배우의 호연이 뛰어넘는다. 나아가, 배우의 힘만으로 캐릭터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각자의 사연이 직설적으로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브래드 피트와 댐슨 이드리스는 이미 밝혀진 사연의 뒷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고, 가늠하게 하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하비에르 바르뎀의 새로운 얼굴이 인상적이다. 본작에서 그는 <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봐왔던 마스크와 완전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물론 캐릭터가 가지는 평면적 한계가 아쉽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부와 지적 소양을 양껏 충족한 단주의 모습을 너무 뻔하지 않게 연기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으면서 자라, 에스파냐 문학 특유의 마법적 사실주의와 솔직하면서도 관능적인 언어에 익숙한 스페인 출신의 배우답게, 그는 승리에 목마른 amigo, 루벤 세르반테스의 얼굴을 매력적으로 연기한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동명의 영화에서 안톤 시거를 연기하기 위하여 원작인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캐릭터에 녹여낸 매카시식 캐릭터 창조력 및 해석력에서 받은 영향을 본작에서도 드러낸다. 유쾌하고 긍정적이며 낙천적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결핍과 두려움에 직면이 가능한 사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늘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가진 다층적 매력과 능력을 담백하게 보여주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본작은 워너 브라더스의 적합한 선택들이 모여 만든 충실한 오락영화다. 적절한 영화 언어, 레이싱과 드라마의 완벽한 비중(이 덕에 관객이 계속 긴장되는 레이싱에서 적절한 시기에 벗어나 피로감을 낮출 수 있고, 반대로 긴장감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극대화될 수 있다.),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캐스팅과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연출,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낸 순수한 오락성까지. 영화가 딱 맞는 옷을 입는다는 것이 뭔지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 내 캐릭터들 뿐 아니라 영화 자체도 성숙해 가면서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고,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간다는 점에서 유기체와 같다. 관객들의 작품에 대한 해석 또한 영화를 확장시키는 영향력으로 작용하므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일수록 성장의 범위는 예측이 불가하다. 그렇지 못한 영화는 딱 맞는 옷에 맞춰 비슷한 다른 영화로 알맹이를 갈아 끼우는 것으로 변화나 확장을 대신해야 한다. 막내의 너무 빨리 작아져버린 옷이 떠오른다. 몸에 딱 맞는 옷은 너무 예쁘지만, 아이에게 이야기가 생기고 우주가 점차 자라면, 점점 아이에게는 다른 옷이 필요해진다. 모든 유기체에게는 성장의 다음 시기에 입을 여분의 옷이 필요하다. 물론 덕션이 진력을 다하여 맞춘 클래식 비스포크의 가치는 빛난다. 그러나 소니와 JP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도 서서히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영화가 자랄 틈이 없다는 점, 이야기가 자라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점, 영화가 내재하는 다양성의 한계. 멀리 바퀴가 닳아져 가는 레이싱 카가 박스를 외치며 달려온다. 피트에서 대기하는 엔지니어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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