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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6. 2024

맨홀의 끝

<La Practica>, 마르틴 레흐만, 2023

[La Practica(The Practice) - 마르틴 레흐만] 맨홀의 끝

와! 저 궁금한 것이 있어요. 운전 중에 물어봐도 될까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영어로 나누는 대화가 어색하면서도 사뭇 진지하다. 앞 좌석에 선팅이 벗겨져 햇살이 와와 마떼우의 얼굴로 쏟아지고 있다. 와는 늘 웃는 얼굴이다. 당연하죠. 발리 곳곳에 보이는 조각상들 말이에요. 다들 왜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최소한 무표정. 웃고 있는 표정은 거의 못 본 것 같아서. 혹시 'Yin and Yang'에 대하여 아세요? 알죠. 음과 양. 동양 철학에서 조화를 논할 때 기본이 되는 개념이에요. 아, 그런데 그것보다는 음, 선과 악이요. 아까 설명드렸던 것처럼, 발리에서의 힌두교는 원래의 힌두교와 조금 다릅니다. 힌두교는 인도와 네팔의 다수 종교다. 힌두교 교리상 남아시아 밖으로의 전파에 한계점이 많기 때문에 남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힌두교를 믿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발리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일이다. 게다가 인도네시아의 다수 종교는 이슬람이다. 발리에서 발전한 힌두교는 토속신앙과 민족종교인 이슬람과 융합되면서, 카스트 제도를 더 이상 포함하지 않게 되었고, 특유의 다신교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조금 더 유연한 사유를 포함하게 되었다. 탄생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힌두교와 불교가 탄생한 인도가 다신교의 국가였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까 다신교적 특성은 현재는 발리식 힌두교의 특유한 점이지만, 힌두교의 선천적 본질의 계승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힌두교의 본산에서도 신앙을 이유로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특히 발리에서의 힌두교도들은 주신으로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중 한 신만을 인정하고 모시거나 서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들 모두의 가호가 인간 삶에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따라서 그들 모두를 믿고 모신다. 그들은 타인의 신앙이 나와 다른 형태로 전개된다고 해서 견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인생의 다층적인 면모를 모두 인정하고, 나아가 신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뿌리가 인도에 있고, 인도는 다신을 전제로 발전한 문화 위에 세워졌다. 와! 가 말을 잇는다. 발리 사람들은 신에게도 선과 악이 있다고 믿어요. 인간이 그렇기 때문에 신에게서 지혜를 구할 때도 다양한 레퍼런스가 필요하다고 믿고요.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신들처럼요? 맞아요.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원(둥글 원 圓)을 뜻하는 만달라(Mandala)에서 유래하여 다양한 개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힌두교에서 파생하였지만 불교에서도 사용된다. 양 종교는 수행 과정에서, 특히 밀교의 수행과정에 있어서 보조 기구로 만다라의 문양을 활용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이는 만트라(mantra, 진언)로 명상하며 삼매(삼매, 사마디, samadhi)의 경지에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불교에서의 삼매란 대상 하나에 주관, 객관, 의지를 집중시켜 결국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깊게 빠져드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불교에서 만다라 꽃은 연꽃을 지칭하며 불상 앞에 놓인 제단을 만다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힌두교에서는 만다라가 얀트라(Yantra)라는 힌두교 고유의 문양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결국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든, 만다라는 번뇌에서 자유로운 적멸(고요할 적 寂, 꺼질 멸 滅)의 순간과 나아가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하는 열반(개흙 열 涅, 쟁반 반 槃, Nirvana)에 오르는 순간과 깊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고, 깨달음은 원형에 기반한 균형감 있는 구조와 다양한 개체를 동일한 무게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다라의 모양으로 수렴한다. 다양한 개체가 모두 신이었던, 그래서 작은 것들과 약한 것들도 신일 수 있었던 까마득한 과거를, 만다라만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몸에 새긴 것들은 대부분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지만, 단청을 닮은 만다라만은 의미가 있다. 번뇌에서 자유로운 채로 오로지 삶에 대한 사랑만으로 가득한 어떤 순간. 삶에 찰나일지라도. 나는 아직 낭만을 꿈꾸는 현대인이다.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즈 섹션에 초대된 마르틴 레흐만 감독의 <La practica(The Practice, 요가 연습)>은, 인간의 삼매의 경지는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그 삼매에 이르기 위하여 선택하는 방법론적 측면에서의 만다라 또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조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관객으로 하여금 삶까지 논의의 영역을 확장하여 삶은 삶의 주체만의 것이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인간의 실존과 그 과정을 다루는 작품은 종종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겁게 그려지기 마련인데, 본작은 대체로 가볍게, 때로는 관객들이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웃긴 블랙 코미디를 구사하면서도, 연습(실천)을 제목으로 하는 작품답게 숙련으로 세련된 표현방법과 다채로운 메타포를 활용하여 균형감 있는 영화언어를 선보인다. 본작은 독일에서 칠레로 이민한 스테파니가 자신의 요가 선생이자 아르헨티나에서 칠레로 이주한 구스타보에게, 구스타보가 자신에게 각별하게 대했고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구스타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게 했다고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요가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지진이 일어나고 모든 수강생들이 대피하지만, 스테파니가 송장자세로 명상하며 누워 있다가 잠든 나머지 피신하지 못하고, 구스타보의 엄마가 구스타보 내외에게 결혼 기념으로 선물했던 병풍이 스테파니의 몸 위로 엎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스테파니는 이 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한편 구스타보의 전 아내 바네사는 구스타보와 스테파니가 불륜관계를 저질렀다고 의심하고 이를 못 견뎌하고, 부부는 결국 이혼 절차를 밟는다. 바네사는 자기가 훌리오와 바람을 피운 유책 배우자임에도 불구하고 의심만으로 구스타보에게 유책이 있다고 요구하며 이혼을 요구하고, 건강한 이혼을 위해 구스타보와 함께 다니는 클리닉에서 구스타보가 진짜 불륜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둘이 함께 살던 아파트의 단독 소유권을 주장한다. 지낼 곳이 없어진 구스타보는 전 아내와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남편은 골초고 아내는 멍청한 처남 내외의 집에 얹혀 산다. 설상가상 구스타보는 수련회에서 반월판 파열로 무릎에 큰 부상을 얻게 되고, 부상을 이겨내기 위해 근력운동과 소염제를 처방받는다. 동시에 부부 심리상담 클리닉에서는 항우울제를 처방받는다. 구스타보는 무릎이 어느 정도 치료 되자 다시 수련회에 갔다가 예전에 자신의 제자였던 남성이 자연과 영성은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수련장 근처의 숲에서 자연인처럼 생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숲에서 맨몸으로 야영을 경험하고, 하룻밤 사이에 지진을 포함한 기이한 일들을 경험한다. 수련회장 운영자는 네 번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수련회장 건물들은 끄떡도 없다고 자부심에 차서 이야기하지만, 구스타보는 요가 수련을 하면서 수련장 벽에 금이 가있는 것을 본다. 예전에 자신에게 수업을 받았던 제자에게 관계를 열어두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본작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구스타보와 바네사의 이혼과 그 후의 기묘한 일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본작이 본질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구스타보의 인생이 수동적인 선택들의 합집합에서, 주체적인 결정들의 결정체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구스타보는 두 번의 지진을 기점으로, 자신의 일상에 균열이 생겼음을 느낀다. 초반의 구스타보는, 지진으로 인하여 스테파니가 다치고 이후 자신의 계획이 꼬여버린 것에 대하여, 그때부터 일이 잘못되어 갔다고 이야기하면서 일상에 생긴 변화를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지진 사건 이후 자신에게 벌어진 이상한 일들을 겪으면서 그는 점점 변화한다. 근력운동을 통해서도 삼매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밋밋한 인생에도 맨홀에 빠지는 순간(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음을, 자신이 열려만 있다면 여전히 자신의 삶에 다양한 가능성이 허락된다는 것을 배운다. 또한 그는 삼매라는 특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하여 인도로 순례와 수련을 떠나거나 엄격한 수련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요가를 하는 이라면 무조건 몰입과 삼매에 이르러야 한다는 타인의 보편적 시선에 맞춰 수련의 목표를 설정할 것이 아니라,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차마 밖에 꺼내놓지 못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여 수련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인간의 목표는 천편일률적일 수 없다. 이는 타인의 평가와 관계없이, 자신의 삶의 목표와 의미는 자신이 부여한 그대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르트르식 실존주의와도 깊게 맞닿아 있다.  구스타보는 18년 동안, 주 5일, 하루 3번, 1 클래스당 평균 15명이 듣는 요가 수업을 운영한다는 직업적 한계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취사선택’하여 다가오고, 그들의 컨디션에 자신을 맞추면서 관계에 끌려다녀야 했던 삶에 이별을 고한다.


감독은 구스타보의 깨달음을 심오하게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유쾌하고 겉보기에는 고상하지 못한 설정들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본작의 중요한 메시지들을 암시한다. 스테파니가 요가할 때 내는 신음소리와 수련장에서 그녀가 수련원 직원과 성관계를 가지면서 내는 신음소리가 같다는 사실이나, 근력운동의 강도를 높일수록 더 깊은 명상이 가능하다는 발견 같은 장면들은, 인간의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보다는 진실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음을 암시한다. 요가 수련자들은 유연하다는 사실보다 보이는 것이 중요해서 몰래 발륨을 섭취한다. 구스타보의 처남은 골초답게 음식을 먹으면서도 담배를 피우고, 아내의 요리 실력을 혹평한다. 구스타보가 이사 간 집주인은 구스타보가 처남집에서 지내면서 옷에 밴 냄새를 맡고, 구스타보가 흡연자든 아니든 실내에서는 금연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구스타보는 원리주의자는 아니지만 마늘을 먹지 않고 흡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는 마늘과 담배 냄새가 배어 있다. 진실보다 어떻게 감각하느냐에 의존하여 상대를 파악하거나, 내가 상대에게 어떻게 감각되느냐가 중요한 시대임이 이런 설정들 덕분에 두드러진다. 구스타보가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여성에게 수업을 듣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둘의 관계에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고 고백하고 그 대화과정에서 맨홀에 빠지는 장면은, 그가 사랑에 빠졌고 그 관계에서 예전처럼 수동적인 연인으로 남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자신의 직업인으로서의 삶이 더 이상 그의 사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을 표상한다.


구스타보가 이민자로서 요가선생으로 자영업을 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고, 관계와 삶에 수동적으로 임하고, 타인에 의존적이라는 세 가지 상황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문제를 심화시킨다. 본작은 구스타보와 관계있는 인물들이 구스타보를 다리 삼아 한 장면 속에 모이는 장면을 여러 차례 제시함으로써 그가 늘 아내, 어머니, 상담사, 의사, 수련원장, 운동 코치의 말에 둘러 싸여 있고, 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지적으로 표현한다. 그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모여있다는 점에서 그는 상황의 중심인물이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지진과 세상의 중력이 늘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지만은 않는다는 깨달음 이후, 그는 프레임 안에 엉거주춤 걸쳐 있지 않고, 멀리서 상대를 지켜보거나, 상대와 일대일로 관계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처방을 내리고, 삶의 의미를 개척하는 인간으로 변모한다. 바네사가 로드리고가 선물한 무전기가 달려 있는 헬멧을 내려놓고, 마침내 그것을 팔아버린 것처럼.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 맺고, 타인과 나의 관계에서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 평생 타인의 선택에 의존하여 관계 맺기 해왔던 구스타보는 타인과의 관계에 더욱 주체적으로 임하고, 이제 스스로 관계를 선택하고 운영해 나가며, 나아가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만 운영하기로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다른 길을 걷고, 다른 믿음을 품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과 악은,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우리 삶에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불행하게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악이 종종 등장하기는 하지만. 모두가 인정할만한 절대적인 악인들도 누군가에게는 선인 순간이 있었을까. 창밖에 빗방울이 번진다. 혹시 비가 많이 오려나. 빗방울이 온몸으로 땅에 부딪어 내는 소리가 모여 천지에 가득하다. 제법 쏴아아 큰 소리가 난다. 창문을 열고 그 풍경을 듣고, 그 소리를 내려다보면서. 짧은 시간 나는 삼매를 겪었던 것 같다. 이 연약한 빗줄기가 만다라였던 셈이다. 오른쪽 아래 골반에 생긴 만다라가 아릿한 것만 같다. 창문 밖에 풍경을 따라 여린 연꽃잎에 빗방울이 여울진다. 그래서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군요. 누군가는 악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선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대부분의 순간에 선하지만 악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고, 누군가는 대부분의 순간 악해서 그런 표정을 짓기도 하고요. 맞아요. 신도, 솔직하군요. 인정하는 것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나아가는 데에 제일 필요한 덕목입니다. 여행 가이드 애플리케이션에서 칭찬 일색인 리뷰들의 주인공으로 높은 평점을 기록하는 가이드답게, 와! 는 평소에도 자신의 문화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는 모양이었다.


문득 악귀를 잡는 악신으로 요약되고는 하는, 사찰 입구에 서계신 사천왕들을 생각했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한 표정으로, 잘못 없는 발끝도 괜히 저리게 하는 방망이 든 손들을. 어쩌면 그들도 보살님이 챙겨주신 음식을 들고 아빠 왔다. 하고 퇴근할까. 우와! 아빠 오늘은 악귀를 많이 잡았나요? 말도 마라. 아빠 어깨 좀 주물러주렴. 하며 껄껄 웃지는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다. 작은 딸의 겨드랑이에 그 큰 손을 끼워 서울 구경을 시켜주시던 우리 아빠도 센터에 가면 무시무시한 결재권자였을까. 중요하지도 않은 문장의 호응관계를 가지고 트집 잡아서 불호령을 내리는 밥맛 없는 상사였을까. 소나기였는지 비스듬한 볕 사이로 빗방울이 잘아진다.


Yin and Yang(그늘 음, 침묵할 암 陰, 볕, 해, 양기 양 陽)이 우주 만물을 두 가지 기운으로 나누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대립 관계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계를 더 다양하게 나눌 수 있는데 그냥 뚝딱 간단하게 양분해 버린다고.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말을. 선과 악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음과 음 사이에 넓은 스펙트럼이 있었군요. 우리 세계는 역시 참 복잡해요. 이야기도요. 관계도요. 마음도요. 여러 단면을 가지고 있고, 그 단면들마저도 여러 층을 가지고 있고요. 근력 운동으로 명상의 순간에 도달했던 구스타보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삶을 복잡하고 어렵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만으로 우리는 어떤 궁극의 깨달음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복잡하다는 것은 사실일 뿐이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방법이 있을까요? 이 복잡한 세상을, 복잡한 대로도 괜찮게, 상대적으로 선(착할 선 善)의 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요. 이름 모를 조각상이 대답했다. 그건 사랑이다. 그래, 속절없이 맨홀에 빠지는 순간 덕분에 우리의 삶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맨홀의 끝이 적멸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면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열반을 위한 긴 연습일지도 모른다. 싱겁다. 그런데 맞는 것 같아요. 사실은 웃고 있는 거죠? 그 얼굴에 마주 웃으며 호다닥. 1월의 볕이 너무도 눈부셔서, 조각상 얼굴에도 손차양을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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