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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Aug 20. 2020

누구도 나를 동기부여할 의무는 없다. 오로지 나밖에는!

5년 전에 쓴 출장 보고서를 꺼내보고 나 칭찬하기-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아기엄마로 병행할 내 이름의 새로운 일을 구상하는 지금, 나는 지난 10년간 몸담은 수많은 프로젝트들을 뒤돌아보고 있다.


내가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어디에서 현타가 왔었는지, 무엇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었는지에 대해서 다시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까맣게 잊어버렸던 일의 기억은 쉽지않은 임신과 출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말 많은 일이 있었기에 왠만한 강렬함 없이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터, 맞다 나는 내 뇌탓만 하고싶지는 않다. (출산 후 내 몸 사랑하기 운동 중입니다)


어제 열어본 이동식 디스크에서 5년전에 작성한 출장보고서를 꺼내보았다. 브랜드 론칭이라는 미션을 시작하기 앞서 해당 브랜드의 본국인 미국으로 떠났던 출장이었다. 처음 딛여본 미본토였다. 본사는 미국 뉴저지에 있었는데, 일단 뉴욕에 도착해서 같이 온 팀과 바이어들과 시장조사로 시간을 보내고, 브랜드 매니저인 나만 본사에 가서 3일간 브랜드 인덕션을 받는 일정이었다.


총 15명이 세션을 준비해주었던 강도 높은 인덕션이었다. 유럽에서의 시차는 그럭저럭 참을만 했는데, 미국은 도통 시차 적응을 할수가 없었다. 호텔방 까만 새벽 두시만 되도 눈이 또렷해졌다. 새벽녁 잠이 들지 못하고 노트북을 만지작하다가 뉴저지 본사로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꽤 괜찮은 말짱한 정신으로 도착한 회사 정문이었는데, 세션 두세개가 지나면 언제 그랬듯 폐인이 되었다. 나는 그야말로 뿌연 안개속에 사경을 헤매며 15명의 미국 본사 직원들의 발표자료를 보았다. 자기네 브랜드를 소개하겠다며 아시아 아무개 나라에서 온 젊은 브랜드 매니저 앞에 카테고리별로 초호화 과외급 세션을 해주는데도, 나는 그 앞에서 졸고 앉아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경험이다. 회사에 갓 들어온 31살 초짜의 브랜드매니저에게 엄청난 투자였고, 황홀할 정도의 현지 세션이 이어졌는데 나는 자고있었다. 하아, 그래도 세션은 멋졌다. 반은 기억을 못하지만 말이다.


하, 어쩌겠는가 나는 그때 어렸고, 대륙을 넘은 첫 출장에서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긴장감에 군기가 잔뜩든 쫄병이었다. 타이트한 일정에 맞물려 실패한 시차적응은 나도 어찌못하는, 그래서 더 초짜스러운 출장이었다. 그 가운데에도 함께 간 국내 유명 유통사의 바이어가 제출해야할 출장보고서 겸, 나의 보스에게 낼 나의 출장보고서를 준비 하고 있었다. 세션에서 조느라 미제 책상에 침을 흥건히 묻히던 말던, 돌아가면 바이바이 반가울 동료들이지만, 이 보고서만큼은 개판을 치면 정말 단칼에 내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순전히 살기위해 만들었던 리포트였다. 무진장 졸던 세션이 끝나도 전체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던 건 그 모든 세션들을 다 녹음했기 때문이다. 장장 23시간의 생생한 녹음 파일이 나에게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준 생명줄, 한양에서 김서방을 찾아줄 동아줄이었다. 미국식 현지 발음에 익숙하지 못해서 놓쳤던 내용이나 두 번이상 물어본 것 같은데 여즉 이해못한 것 같은 것들을 찾을 요량의 녹음 파일이었는데, 결국엔 내내 조는 바람에 통짜로 귀한 자료가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종종 한국어로도 놓치면 안되는 세션이나 미팅은 녹음을 해서 놓치지 않으려했다.


7일의 출장동안 매일 그 녹음파일을 들으며 그날의 있었던 새로운 인사이트, 몰랐던 사실들을 복기했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배운 것 치고는 훌륭한 하나의 브랜드 세션 리포트가 완성이 되었다. 5년전, 그러니까 이미 프레젠텐이션 가로세로 부터 옛날의 그것인 파일을 열면서 그때의 시간이 떠올랐다. 촌쓰러운 글씨들, 지금은 무척이나 어색한 촌쓰러운 팩샷들 (5년간 제품 키비주얼이 무진장 바뀌었다. 그러느라 개고생도 했고)을 보니 마음이 새롭다. 그때의 나도 떠오른다. 지금은 떠나기로 한 회사지만 나의 성장에도 참 섭섭치 않게 해준 회사- 그래 고마운 마음을 많이 남기자는 소소한 결심까지 생기네.


출장보고서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역시나 나는 나의 팬이라는 점이다. 하하, 지금보면 얼마나 촌쓰러울까? 지금보다 5년은 덜 배운/경험한 내가 만든 이 보고서가, 5년의 비즈니스, 이 카테고리를 경험한 내가 보기에 얼마나 어리숙할까 이런 생각으로 첫장을 열었다. 하지만 이게 왠걸, 너무 잘 정리가 되어있었다. 이보다 더 낫게 컴팩트하고 핵심을 집어내긴 쉽지 않을거라는 안도감이 나를 감싼다. 역시.. 나는 나야! :) 사실 그런 이유에서 이 보고서를 기반으로 론칭 보고서를 만들게 되었다. 연간 플랜이며, 좋은 연결점들을 찾았던 보고서라 평가도 받았었고. 이제는 그런 평가할 사람도 없고 이제 내가 나를 칭찬해본다. 하 맞아 이 실력이니, 이런 투자를 받았던게다. 흐흐 


흐믓한 표정으로 넘기는 촌쓰러운 가로세로 비율의 슬라이드에서 땀내도 느껴졌다. 이 자료를 만드느라 녹음파일을 닳도록 복기하며 얼마나 수정하고 다듬었는지- 나만이 아니까. 내 노력을 내가 알아준다는 건 참 좋은 습관이다. 회사밖 세상에서는 내가 나에게 더 많이 칭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만점의 고과도, 수고했다는 보스도 없는 세상이니까- 오롯이 나는 나를 동기부여할 의무를 가진 존재인게다.


오늘도 나는 달린다. 어제 결심한대로 생각은 오전까지만! 오후에는 행동을 하자. 화이팅.



새벽마다 일어났던 좀비- 그리고 도착한 뉴저지 본사 앞 모습, 열심히 정리했던 내 보고서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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