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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Sep 12. 2020

남편의 배달 요청사항

결혼 6년차, 여전히 연애 중

남편은 연애때부터 고운 말투가 매력이었다. 느린 말투에 처음엔 얼핏 어눌해보이기도 했다. 단어 하나하나 쓰임에 맞는지 꾹꾹 눌러쓰는 타자기 같이 말이 나오는 사람이라고 할까?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었다.


남자친구로 애정하기도 했지만 그 전에 친구로서 그의 느긋한 말투와 심성을 닮고싶었다. 남편과 달리 나는 늘상 하달된 업무을 빨리 빨리 나르려 머릿속 할일에 생각보다는 말과 몸이 먼저 나가는 타입이었다. 그런 신속함이 내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다. 다수의 보스가 고과에 남겨준 나의 장점이었고. 다만 흥분할때면 타인과의 대화에도 이 말투가 튀어나왔다. 대화 중에 투두리스트들이 따발총처럼 분사되었다. 생각해보면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5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 사이 남편도 비즈니스를 시작해 빨리빨리가 몸에 벤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말투는 느긋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로딩시간이 걸릴 때마다 나는 퀴즈쇼처럼 먼저 단어를 답하는 건 여전하고. (돌아보니 민망) 성격 급한 참가자가 무슨 말을 하던 평온한 사회자처럼 남편은 나를 대한다. 그런 모습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나는 그런 남편이 참 좋다.


오늘 아침 아이를 줄 우유를 담으러 부엌으로 나갔더니 밤사이 남편이 배달받은 설렁탕 봉투가 있었다. 설렁탕은 위염이 잦은 날 위해 주말마다 즐겨먹게된 우리의 아침이다. 아침 10시 전엔 배달이 안되어 미리 시켜놓은 것이다. 널브러진 봉투를 재활용하려고 들었다가 무심코 남편이 요청한 오더용지를 보았다. 심야에 배달하는 분을 위해 남긴 메시지.


조심히 안전하게 와주세요 :)


남편은 늘 그랬던 것 같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옳게 가는 것- 맞는 방향으로 안전히 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 그래서 우리 가족의 참 좋은 조타수인 남편이다. 배달원을 향한 그의 짧은 글귀에서 그가 보인다. 이런 사람이랑 결혼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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