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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다영 Oct 15. 2020

10년전 아빠의 쪽지

아빠는 서른여덟에 나를 낳으셨다. 내가 세 아이 중 막내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때 그 시절 치고는 꽤 늦은 나이였다. 서른이 넘어서 결혼을 하셨으니 당시엔 노총각 소리를 꽤 들었을거다. 그래도 서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샌님같은 아빠가 강원도 처녀들에겐 제법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아빠는 젊은시절 유덕화와 공유를 반반 섞은 도시형 미남이었다.


지역농협에 다니던 우리 아빠는 내가 기억하는 시절부터 늘 부장이었다. 강원도 시골마을이기에 임부장 하면 누구라도 우리 아빠를 떠올렸다. 짜장면 배달을 시킬때에도 임부장네 라고 하면 어디인지 알아들었으니- 작은 마을의 참된 일꾼이었던 아빠는 농협의 대출 업무를 관장하던 터에 출근하시기 전부터 늘 우리 집은 문전성시였다. 한창 바쁜 농번기에는 새벽에 약치러 가는 길에 들렀다는 동네 아저씨, 농협까지 무얼 갈 필요 있어 임부장한테 물어보자는 아주머니들이 계셨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나에게는 가장 전지전능했던 아빠의 기억이 있다. 지금의 하나로마트인, 연쇄점이라는 농협마트는 나의 초등학교 가는 길목에 있었다. 종종 아빠는 나를 불러 원하는 과자를 골라보라고 하셨다. 새침떼기 소녀는 세상 신난 기색을 숨기며 한참을 심사숙고해 과자 몇봉을 집었다. 그러면 아빠는 카운터 직원에게 당당한 한마디를 건네셨다.


달아놔


그 한마디에 천원 한장 내지 않고도 나는 과자더미와 빠져나올수 있었다. 전지전능한 한마디 였다. 그 멘트가 외상의 의미였고 그 값은 아빠 월급에 원천징수 된다는 걸 한참 후에나 알게됐다.


아빠는 영등포 철물점집 7남매 막내로 태어나 형제 자매에 치여 구박 받으며 공부를 하셨다고 했다. 선린상고 시절, 돈이 없으니 수학여행과 졸업앨범 중 하나만 택하라기에 골랐다는 졸업앨범이 아빠의 보물이었다. 아빠의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소년은 친구들과 잊지못할 여행을 포기한 서러움보다 평생 남을 추억으로 알뜰한 선택을 했다는 안도에 위로를 구했던 것 같다. 서울생활을 하다 부모님이 계신 강원도로 취업한 아빠는 그 때문인지 고등학교 친구들을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젊었을 적 취한 아빠가 종종 그 점을 아쉬워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중학교 말쯤 IMF가 도래했다. 아빠는 그 직전 몇달을 독서실에 살다시피하다 임원 진급시험에 합격한 차였다. 임상무가 된 아빠가 밤새 흘렸던 기쁨의 눈물도 잠시, 노골적인 사측의 의도로 험지로 발령이 났고 그 후로 일이년을 간신히 더 버티다 퇴직 하시게 되었다. 아빠의 퇴직은 나에겐 실로 쇼킹한 일이었다. 그때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이미 대학진학으로 떠났고 강원도 집에는 부모님과 나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겪은 충격보다는 수십년을 한 회사에서 일한 아빠의 배신감과 허무함에 대한 연민이 더 저릿해진다. 철 드나보다.


그 후로도 아빠는 다시 현역으로 뛰고싶다는 바람에서 많은 도전을 하셨고 또 많은 실패를 하셨다. 그 후로 다행히 수중에 남은 땅을 밑천삼아 농부의 삶을 지금껏 걸어오셨다.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아빠는 혼자서 책을 보는 걸 유일한 낛으로 사셨다. 동네 도서관이 아빠의 놀이터이자 쉼터였다. 매해 다독상을 휩쓰셨다. 고등학교 시절 아빠의 기억은 거실 한켠에서 책을 읽는 모습과 술에 취한 모습 그 두가지였다.


그때즘 사춘기였던 나는 아빠와의 관계가 더 소원해졌다. 출근도 안하고 집에 있는 아빠가 무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술에 취한 아빠가 싫었다. 농사 일이 그러하듯 지친 노동에 빠질 수 없는 알코올이었다. 하루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말도 없이 아빠가 찾아왔다. 옷에는 논일을 하다 묻은 진흙이 잔뜩 묻어있었는데 멀리서도 진한 술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친구들 보기에 부끄럽다는 생각에 아빠에게 집으로 가라는 급한 대화를 하는데 아빠의 손에 검은 봉지가 있었다. 봉지안에는 가나초코렛과 과자 한봉이 들어있었다. 우리 가족 다섯 중에 군것질을 가장 좋아하는 아빠와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도 않고 봉지를 잡아채고 아빠를 보냈다. 아빠는 용기를 내서 딸을 찾아왔던 것 같다. 그때의 정독독서실 현관 문에서의 아빠와 나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자식으로서 미안함과 부족한 인품이 죄로 남아 평생 사무칠 장면이 되었다.


작년 아빠 나이 만 71세에 허리를 크게 다치셨다. 아프면 시간이 가속된다더니 숲이는 아플때마다 부쩍 크고 아빠는 그 이후 급속도로 노인이 되셨다. 총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우리 아빠가 실없는 질문을 하는 모습에 우리 세자매는 헛웃음이 나오곤한다. 그런 아빠에게 짜증을 부리는 건 여전하다. 누구나 늙어가는 인간세상인데 그럴 때마다 오만한 나에게 신물이 나지만 또 아빠 앞에서는 새까맣게 잊고만다. 그래도 늙은 아빠에게 이제는 자주 어설픈 애정 표현을 한다. 가족채팅창에 쓸데 없는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타박하기도 하고 또 서로의 식사를 걱정하기도 하면서-


종일 바쁜 오늘, 아빠에 대한 나의 추억을 주절거리게 된 이유는 방금 지갑정리를 하다 발견한 이 쪽지 때문이다. 십년전 사회초년생일적 내 생일날 아빠가 주고간 용돈에 딸린 쪽지였다. 그때도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아빠와 대치 중이었지만 이 쪽지만큼은 지갑에 내내 넣고다녔다. 쪽지를 뒤집어보니 일수업체의 광고종이였다. 아빠가 느껴져서 한참을 쳐다봤다. 십년전 아빠는 무척 젊었었는데, 지금 모습을 생각하니 세월이 야속하다. 그래도 십년 후에 다시 지금 아빠도 돌이키며 그리워 할 날이 올거다.

지금이 소중한 시간이겠지 아무렴- 그래서 더 반가운 깨달음이다.


아빠의 쪽지 십년동안 지갑을 바꾸면서도 잘 있었구나
초딩이던 나와 엄마 아빠, 스머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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