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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Oct 28. 2020

당근마켓에서 생긴 일 2

아기가 돌을 지나자 엄마도 아기도 제법 편안해진듯하다. 서로에 대한 애착과 이해라는 것도 생겼고 주요하게는 임기응변이라는 것이 생겼다. 육아라는 까마득한 동굴 속에서 절규하던게 엊그젠데 이제는 뭔가 보이려하는지... 육아의 암순응이 시작하는가? 육아의 매력이 환장미 라는 걸 인정한 까닭이다.


포기하면 보인다. 정갈히 닦아놓은 거실 바닥위로 보이는게 응가가 아닌 먹다뱉은 카레라 다행이고, 침대시트위로 붉은 색색의 흔적이 아기 피인줄 알고 소스라치다가도 서랍장을 탈출한 인주라는 걸 알아채 다행이고.. 아이가 다치지 않았다면 잘한거다. 고로, 우리는 모두 다 잘하고 있는거고- (암만)


열혈 육아맘에 대한 나름의 기준도 생겼다. 지지고 볶는 중에도 배움은 쌓인다. 덕분에 국민육아템에 대한 의존도와 집착을 줄였다. 결국 우리 아기에게 필요한 건 국민템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과 관심 아니었나 뒤늦게 깨달음을 얻기도 했고- 


그런 이유에서 오늘 나는 처분을 미뤄온 철지난 국민템들을 팔기위해 당근마켓을 켰다. 대부분 아기가 대중없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었고, 수요도 높은 품목이었다. 아이템마다 골똘히 가격을 매기다 이내 포기했다. 정한 가격하나에 일괄 6개 제품들을 묶어버렸다. 판매자 입장에서 내가 올린 가격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포스팅 후 문의 채팅이 쇄도할 때가 바로 그때다. 오늘도 나는 업로딩 버퍼링이 끝나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챗팅창 속에서 역시 또 감을 잘 못잡았나? 소용없는 후회 속에서 부리나케 응답하기 시작했다.


11건의 대화창 속에서 한결같이 일괄가격이 맞는지를 물어봤다. 암요 맞아요! 아 생각해보니 6가지 아이템 중 하나 시세 정도였다는 게 떠올랐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일단 빠른 처분을 원했고 일찍이 육아템 거래에는 욕심을 내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나 역시 그런 혜자로운 주위 엄마들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응당 그래야했다.


밤 10시반, 즉시 오겠다는 챗팅 몇 건 중에 내가 사는 지역구 안에 있는 사람 한 분을 골랐다. 남편을 데리고 바로 출발했다는 분에게 안쓰는 숲이 물건을 보여주며 갖다쓰실지 대화를 이어나갔다. 꼭 필요한 것들인데 받아도 되느냐며 연신 고마워하는 그 분의 응답 뒤로 예상치못한 질문이 나왔다. 그러니까 내 계좌정보를 준 시점이었다. 나더러 서대문역에서 근무한 적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잠들기전 멍했던 내 머리에 띠로리 불이 켜진 순간-


그렇다 나는 불과 며칠전만해도 서대문역 어느 회사의 직원이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에 대해 뭘 아는 사람일까? 시끄럽게 회전하는 두뇌 밖 짧은 침묵 속에서 나는 대출서비스를 이용했던 은행 직원과 얼굴 붉힌적이 있던 거래처, 몰래 가먹던 라면집까지 부지런히 탐색기를 돌려본다. 아니 당신, 생얼과 파자마 바람으로 중고 장난감을 인계해야 할 당신은 대체 누구란 말이오?


정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녀는 몇달전 아기를 낳아 키우던 동료차장님의 아내였다. 내가 아기를 8달 먼저 낳은 탓에 병원과 마사지 등 팁까지 나눴던터라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게다. 세상이 좁다 좁다 하는데 이렇게 좁을 줄이야... 현관문 초인종이 울리고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차장님은 말 그대로 당근셔틀을 하는 남편복장, 영혼이 없는 반파자마 복장에 맨발로 슬리퍼를 끌고 있었다. 야밤의 중고 핫딜을 놓칠수 없었던 그의 와이프는 잠이 든 5개월 갓난쟁이를 이불 더미같은 넉넉한 잠바 품 안에 깊이 묻은채 서있었다.


당근마켓 거래할 때마다 희안한 경험들을 종종 하는데 이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차장님은 아내 등살에 떠난 길에 만날 사람이 바로 2주전 그만둔 회사 동료라는 걸 알고 길가의 트럭에서 들러 과일 한박스를 사갖고 왔단다. 예상치못한 야밤의 집들이가 시작되었다. 한참을 떠들고 웃다가 건넛방 아기가 깬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냈다. 세상이 좁다는 생각만큼 강원도 처자가 서울 한복판에 살붙이고 살다보니 우연히 만날 친구라는 것도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차장님네 부부를 보내고 채팅을 정리하는데, 더 웃긴 장면이 남았다. 아쉽게 구매를 못한 애기엄마였는데 마음은 바로 오고싶지만 남편이 술을 먹어서 내일 오면 안되겠느냐 하여 순위가 밀린 분! 그 분의 남편이었다. 아내가 화가 많이 나서 연락했다며 거래가 되느냐는 긴박한 채팅이었다. 하필이면 안먹던 술을 오늘 먹었다는 남편분의 자책 어린 채팅이 어쩜 이리 귀여운지- 나 역시 핫딜을 놓친 애타는 마음이야 모를리 없는 아기 엄마지만 아내의 당근 셔틀에 부응하지 못해 속상해 하는 남편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웃음이 나왔다. 육아템 당근거래는 보통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주로 거래을 하고 아빠는 퇴근길에 픽업이나 운전을 맡기에 쉽게 그려지는 그림이었다. 사랑스러운 부부에게 내심 장난감을 못내드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참으로 재밌는 세상이야! :)


대화가 미스테리로 흘러가는 순간! ㅎㅎ


야밤의 예상치 못한 전직장 동료와의 집들이 겸 당근거래


남편의 음주로 거래를 못해 썽난 아내분의 성화에 남편분이 따로 연락까지 주셨다. 하 귀엽고 와닿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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