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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n Feb 03. 2017

'다름'에 대하여

#2. 마크 맨슨

초등학교 때 나의 친구들은 H.O.T 보이그룹을 좋아했다. 난 그들이 그렇게 멋져 보이지는 않았다. 난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를 읽으면서 이집트의 고고학자가 되는 상상을 했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카리스마에 전율하면서 잠에 들고는 했다. 황미나의 '레드문'을 읽으면서 엉엉 울고, 이영도의 '드래곤라자'는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렇다. 나는 달랐다. 그리고 나는 나의 다름이 자랑스러웠다.

물론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룹에 끼지 못할 때 주눅이 들고 시무룩해지고는 했지만, 그리고 나의 다름 때문에 상처도 받았지만, 내가 틀린 건가라는 생각에 더더욱 기가 죽었지만. 그런데.


중학교 때 처음 왕따를 당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학교 가는 것이 퍽이나 힘들었다. 점심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자주 굶었다. 나와 매우 친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가 이제 나를 모른 척하는 것이 너무 무섭고 화가 났다. 여러 날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학교에서 1년 다니다가 전학을 갔는데 그 1년 내내 그녀는 나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분명 작년에만 해도 친했던 아이인데. 서러워서 꽤나 울었다. '다르다'가 곧 '틀리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해 본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나의 '다름'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나의 '다름' 이 심지어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다.


 - 왜 나는 남들처럼 편하게 살지 못할까.

 - 왜 나는 남들처럼 그냥 회사를 다니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지 못할까

 - 왜 나는 남들처럼 그냥 그렇게 적당히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지 못할까


아 시발 왜 나는 이렇게 다른가? 그냥 적당히 살고 싶다. 내가 뭔가 잘못하는 게 아닐까. 나를 좀 눌러야 하나. 그게 현실적인 건가. 내가 문제임? 그런 거임?


나의 '다름'이 곧 '틀림'으로 여겨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이 글을 읽었지. 그리고 마음이 조금 맑아졌다.



저 고양이 짤을 보라. 폭탄이 터지든 말든 무심하게 도도히 걸어나가는 저 모습. 그렇다. 저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의 다름인데 뭐 시발. 어쩌라고. 그게 나야!


출처/ markmanson.net


모두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데, 쟤 봐봐! 쟨 진짜 신경도 안 씀. 우왕. 멋짐.


나처럼 이상하게 다르고 별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지면 멘탈도 강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난 유리 멘탈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 수는 없는 것이고, 당연히 나랑 존나 안 맞는 사람도 있는 것이 지극히 매우 정상적인 사실인데 그것 때문에 그저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아 시발 나랑 안 맞는구나. 뭐 하는 수 없지 뭐.


이게 안됨.

그저 아니 왜. 하면서 폴짝폴짝 뛰고 마크 맨슨 아저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i give too much fuck about being accepted and being loved'인 것이지. 그 외에도 수많은 자잘 자잘한 것들에 너무나 많은 fuck 혹은 쓰잘데 없이 에너지를 쏟으면서 살지 않았나. 반성해본다.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은 무관심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를 당연히 여기는 것이다.

Not giving a fuck does not mean being indifferent, It means being comfortable with being different.


내가 이 대목에서 아아! 하고 이 글을 써서 널리 많은 종족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난 글을 쓸 때 '시발'이라는 비속어를 꽤나 자주 쓰는데 난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 그게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잘 표현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그리고 나의 다름이고, 그냥 그런 것이지, 굳이 신경 하나하나 쓰면서 살지 않는다. 피곤하니까.


고개를 연방 끄덕이면서, 그래 이제 나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그냥 신경 끄고 살아야겠다. 다짐을 해본다. 그러나 역시 한 5분 후에 여전히 신경 겁내 쓰고 있는 본인을 발견. 아. 다시 주화입마. 어쩌냐고?


신경 끄고 살려면 그런 것들보다 '더 의미 있는' 것에 신경을 쓰고 살면 된다.

To not give a fuck about adversity, you must first give a fuck about something more important than adversity.


이분은 득도한 사람인가. 과연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다름'때문에 신경 쓰이고 눈치 보느라 힘들다고요? 그건 지금 그 신경 쓸 정신이 남아도니까 그런 것임. 그것 말고 니 인생에 겁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들이 있다면 남 눈치를 왜 보고 살고 자빠졌냐. 다시 말하면, 니 인생이 워낙 겁내 밋밋해서 남 눈치나 보고 있는 거임. 뭐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마루야마 겐지라는 일본 할아버지가 있다. 이분의 대표 저서 중에 하나 제목이 이러하다.


소제목. 인생이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이 분의 인생 스토리를 슬쩍 읽어보니 과연 대단한 삶을 사셨다. 철저히 세속과는 연을 끊고 본인의 업인 글쓰기에 몰두하여 글만 진짜 쓰면서 산속에서 평생을 사셨다. 이 책 내용을 보아하니 너네들은 왜 이렇게 남 눈치 보면서 병신처럼 사냐, 동물만도 못한 것들, 태어났으면 제대로 좀 살아라, 뭐 이런 내용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저력의 한 톨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단 한 번의 인생을 끝내려 하고 있다. 당신은 뭐라고 둘러댄들 그것이 당신의 지금 실제 모습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요컨대 당신은 당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의 지배도 받지 말고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답게 살아내려 고군분투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젊음을 지녔다.

매사에 본질과 핵심을 파헤치고 '자신'이라는 것을 최대한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이 분도 과연 평생 don't give a fuck 하면서 본인의 철학대로 독고다이로 사셨구나. 이것이 나의 '다름'이야! 호령하면서,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 가치대로 살면서, 한 평생 그걸 증명하면서 살고 있구나. 어찌 보면 'i dont give a fuck'은 즉 내 '다름'에 기반한 나의 '철학과 가치'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 그러하니 뭐 나머지는 그저 부수적인 것일 뿐. 철저한 '자신의 철학' '자기애' 혹은 '똥고집' 대로 살고 나머진 '쿨'해지는 것.


과연. 리스펙트.


*cover image from markmans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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