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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n Feb 19. 2017

단순한 육체노동이 주는 위로

#20. DIY를 하는 이유

어제저녁 친구와 대판 다투고 난 후 마음이 심란했다.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 어렵다. 아아... 마음이 참으로 가난하구나. 멍하게 앉아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앉아있다가. 서성거리다가. 다시 앉았다가.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아 닝기리... 백날 요가하고 명상하면 뭐하니. 이렇게 한방에 훅 날아가는구나. 하...


그래서 청소를 시작했다.


회사생활을 하느라 바쁠 때는 청소만큼 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구석구석 치우다 보면 내 마음도 덩달아 말끔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그뿐인가? 청소를 하다 보니 이전에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것들이 눈에 마구마구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기 싫어서 뜯어내버린 문짝,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유리병과 박스, 강아지 꿍이가 뒹굴어서 지저분해진 이불 등등


좋아. 내 손으로 다 고쳐서 정리해보지 뭐!


거울이 붙어있던 문짝은 집안 식구들이 전신 거울로 활용할 수 있게 올려두었다. 근데 거울이 뭔가 휑뎅그렝해서 문구를 적었다. "You are beautiful as you are!" 거울이니까! 볼 때마다 기억하라고! 


너는 충분히 이뻐! 사랑스러워!


유리병 박스.. 오! 이건 의자로 만들면 되겠구먼. 안 그래도 의자가 부족한데 잘 되었음! 페인트 칠을 하니까 그럴싸한 의자 완성!


슥샥슥샥 페인트칠 ~


쨘! 의자가 나타났는데 그에 맞는 테이블이 없음. 아하. 문짝을 테이블로 만들고 밑에 받침대는 페인트통으로 하면 되겠구먼. 그리하여 테이블 완성!


테이블 그리고 의자. 여기서 수박을 먹으면 됨!


집 뒤편에 명상을 하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굴러다니는 화분을 잘 씻어서 향을 꽂고, 굴러다니는 박스를 흰 페인트 칠해서 정돈한 후, 그 위에 쓰지 않는 베갯보를 올리니 제법 그럴싸한 테이블이 되었다. 쨘! 명상의 공간입니다. 


명상을 하는 시늉. 그리고 달려온 꿍이


정신없이 뚝딱이다 보니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어두워지고, 분주한 나를 도와 다른 식구들도 함께 이것저것 만들고 있었다. 한 명은 안 쓰는 바지를 모아서 쿠션을 만들고, 한 명은 안 쓰는 유리병을 잘라서 컵을 만들겠다고 낑낑거리고 있고 (그리고 결국 실패... 또르르..).. 그렇게 정신없이 뚝닥 뚝닥. 침울하던 마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내 정신은 온통 어떻게 이걸 활용해서 멋진 소품을 만들까. 어떻게 우리 집을 더 멋지게 만들까 생각뿐이었다.


피곤해서 맥주 한 잔 들고 철퍼덕 앉았다. 온통 시꺼메진 발바닥과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아. 좋다.

이래서 육체노동을 해야 해.


"바나나  -2017.02"


백날 스마트폰 들고 머리만 데굴데굴 굴리는 현대인들은 다시 발바닥을 시꺼멓게 만들고, 땀을 흘려야 해. 헬스장에서 말고! 쨍한 햇빛 아래에서 새까만 땅을 밟고서


백날 미래를 이야기하면 뭐한담.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지도 않을 수 있는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예측하고, 떠들어대는 우리들은. 얼마나 한편으로 헛똑똑이들인지.

인공지능이니 빅데이터니 외치는 당신. 페인트칠 할 줄은 알아? 씨앗을 뿌려는 봤니?

우리는 두 다리를 땅에 딛고, 땀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오늘, 현재, 지금, 당장을, 매우 충실하게, 단순하게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관계? 그래 맞아. 어려워. 마음은 속상하지.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걸. 


마음이 어지러우니 그저 몸을 움직이자. 몸은 정직하니까. 땅은 정직하니까. 그들은 단순하고 거짓이 없으니.


그래서 배고프니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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