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34

기대했던 것보다.

by 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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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행 계획을 짤 때 큐겐호프와 잔세스칸스 둘 중 하나는 뺄 생각이었다. 얼핏 주워들은 바로는 둘 다 ‘풍경이 예쁜 곳,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는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 다 가고 싶어하는 학우들이 있어 그렇게 하기로 결정.


그 결과 오늘의 여행지는 어제의 큐겐호프에 이어 잔세스칸스다. 풍차의 마을. 딱히 기대는 안했다. 예쁜 꽃들도 계속 보면 감흥이 떨어지듯 예쁜 풍경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역에서 내려 잔(zaan)강의 다리를 건너는데 저 멀리 풍차들이 보인다. 구름은 풍성했고 들판은 넓었다.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온 풍차들. 네덜란드하면 떠오르는 그 풍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풍차는 보고 와야 어디 가서 네덜란드 여행했다고 떵떵거릴 수 있으리라. 강 다리를 건너 잔세스칸스 마을에 도착했는데, 마을의 정체성을 처음 확인한건 눈이 아닌 코를 통해 흘러들어온 초코 가루 냄새. 마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냄새는 진해져, 달콤하기보다는 꼬리꼬리하게 묵은 내로 바뀌었다. 어느 공장에서 이렇게 초코 가루를 열심히 만들길래 온 마을에 냄새가 진동할까. 생각하다 강물을 봤다. 물에 초코 가루를 탔다고 해도 믿을 만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짙은 똥물이다. 어쩌면 냄새의 근원은 강 이었을 지도.


마을에 들어서니 시계박물관이 있다. 10~20분 관람이면 충분한 작은 집 안에. 박물관에 존재하는 소리는 내 발소리와 시계소리 뿐. 각종 시계가 저마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꽤나 무섭다. 겁 없는 사람도 한 밤중에 불을 끄고 그 곳에서 가만히 있진 못할 게다.


98년쯤이었나 KBS2에서 '천사의 키스'라는 드라마를 방영했었다. 확실한 선/악 구도에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배우 조민기씨는 극 중 '시계 악마'역으로 시계를 주무기 혹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역이었다. 마지막 쯤에 술병을 사용하는 윤문식 씨한테 패한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상대와 대판 붙기 위해 시계를 대량으로 준비했던 조민기씨였다. 당시 악마의 시계들과 이 고요한 공간 속의 시계들이 오버랩 돼 더 무섭기도 했다.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는데 정말 예쁘다. 이렇게 좋아할거면서 왜 이 곳에 안 올 생각을 했었는지. 양도 있고, 오리도 있고. 강변을 따라 분포한 집들이 정말 아기자기했다. 오랑쥬리에서 나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모네도 이 곳을 상당히 좋아했다.


마을엔 풍경 뿐 아니라 다른 볼거리들이 많았다. 방직공들이 살았던 집엔 방직 작업에 대한 설명과 네덜란드 전통의상, 신발 소개까지! 집들이 너무 예뻐 기념품샵에 있는 주인에게 물어봤다. 이 동화같은 마을에 정말 사람이 사는 건지. 그런데 놀랍게도 샵의 2층이 주인 본인이 거주하는 집이란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가게 운영이 마을 주민들의 노동 중 하나였다.


여기까지는 전주 한옥마을 느낌이 강했다. 그 공간만이 지난 고유한 풍경과 각종 볼거리까지. 그런데 잔 지역(zaan region)의 역사를 설명하는 박물관은 내가 여겨왔던 잔세스칸스의 이미지를 꽤 전환시켰다. 방아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곳 풍경의 고유함을 부여해 준, 풍차다.


원자력 발전에 최첨단을 달리는 현시대인의 관점으로 본다면 풍차는 낭만적이고 예쁘기만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은 풍차 발전이 네덜란드 전체 전력의 5%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에 풍차는 산업의 원동력이었고, 네덜란드는 유럽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자연히 이 곳에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오일, 초코, 선박, 비누, 꿀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었다. 모네의 그림도 한 점 있다. 딱히 맘에 드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잔 지역의 역사를 보고 나면, 초코, 비스켓 공장이 있다. 그 곳에는 초코의 제작 과정을 리얼하게 볼 수 있는데, 공정 노동을 직접 경험해보는 게임도 있다. 반죽을 날라 떨어뜨리고, 얇게 펴서 모양을 찍어내는. 등의 게임. 노동은 확실한 3단계로 분업되어 있어 어떤 일을 택하든 노동자는 그 일만을 해야한다. 처음 1분간은 다들 재밌다고 열심히 게임을 했지만, 상상해보자. 하루 열 시간 이상씩 이렇게 반복적인 육체노동을 계속 한다면 인간이 어떻게 될지. 영화 <모던 타임즈>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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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잔세스칸스 구경에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날씨가 더 화창했다면, 큐겐호프 때 처럼 4월말이나 5월초쯤 왔다면 더 좋았을걸. 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오후 3시 54분, 피크 시간이 되기 6분 전에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잔세스칸스 기념품샵 주인이 알려준, 암스테르담 9 straatjes에 가기 위해! 주인은 내가 구제샵에서 샀을 때 옷을 담은 가방을 보고, 자신이 암스테르담에서 쇼핑하는 곳을 알려줬다.


9 straatjes의 옷가게는 대부분 편집샵. 핸드메이드 제품들도 많아 나에겐 낮은 가격대가 아니었다. 옷들은 꽤 예뻤지만.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가죽 제품을 취급하는 상점에서 드디어, 동전 지갑을 구매했다. 크기는 정말 작지만, 지갑 색이 너무 오묘하다. 칙칙한 듯하면서도 영롱한, 신비로운 느낌.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작은 크기 덕분에 가격도 6.75유로. 실용성은 살짝 떨어지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구매였다.


오늘 계획은 별다른 기대 없었던 잔세스칸스 다녀오기. 뿐 이었지만, 잔세스칸스는 생각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고, 두 달간 찾아왔던, 마음에 드는 동전 지갑을 드디어 구입하게 됐다. 역시 기대가 없고, 욕심이 없어야 행복은 찾아오는 것인가. 싶지만 5월에 갈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기대를 누그러뜨릴 생각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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