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35

어쩌면 파리보다 더 낭만적인.

by 래리

초록눈에 붉은 턱수염을 가진 고흐의 고향은 네덜란드. 고흐의 명성으로 볼 때 당연히 그 만을 위한 미술관이 있을 법도 하다. 오늘은 첫 일정은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반 고흐 미술관. 스페인친구 이레네와 오전 11시까지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이레네가 실수로 다른 기차를 탔단다. 뭐 어쩌겠는가. 이레네와는 다음 여행을 약속하고 한국인들끼리 미술관에 입장했다.


미술관 밖, 반 고흐를 느끼러 온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하고 온다면 기다림없이 입장할 수 있다. 네덜란드 뮤지엄 패스카드를 보여주고 빠르게 입장. 내부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금껏 갔던 그 어떤 미술관보다 붐비는 것 같다. 루브르, 오르셰도 사람이 엄청 많았지만, 건물의 규모가 커서 그런지 이 정도는 아니었다. 미술관 내 모든 작품들을 줄 지어 감상한 경우는 처음이다.


첫 전시는 자화상. 고흐는 다양한 색채 실험을 했다. 자화상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 여느 인상파화가처럼 배경은 단지 부속물이 아니다. 고흐의 얼굴과 배경의 경계가 희미하고 얼굴과 배경이 어우러져 전달하는 이미지가 있다. 얼굴의 푸른 음영과 배경이 전달하는 이미지는 뭘까. 잘 모르겠다.


고흐는 다양한 표현 기법도 연구했다. 선이 굵은 붓터치로 유명하지만, 자화상들만 봐도 굵은 붓터치 기법만을 활용하진 않은 것 같다. 모자와 표현기법에 따라 신분이 달라 보이는 점도 흥미롭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밀짚모자를 쓴 모습도 있고, 중절모를 쓴 모습도 있다. 밀짚모자를 쓴 모습이 전부 농부처럼 보이진 않지만, 파이프를 물고 있는 그림은 정말 소박한 농부의 모습이다. 중절모를 쓴 자화상은 대게 화가 보다는 엘리트 지식인의 느낌이 강하다. 막스베버 같기도 하고.


27세. 예술을 '시작'하기엔 조금 늦은 감 있는 나이에 그는 본격적으로 미술에 뛰어들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뒤쳐진다는 느낌을 피하고 싶어서인지, 그는 다양한 기법들을 열심히 공부했고 파리에 가서 여러 미술가들과 만나기도 하고 미술관에 가기도 했다. 말년엔 시골을 찾아 프랑스 남부 아를에 갔다.


고흐의 생은 말미에 정신병원에 머물다, 37세의 자살로 끝났지만, 그의 예술적 영향력은 아직도 전세계에 강력히 남아 있다. 당시에는 실질적인 10년의 예술활동으로(상당히 짧은) 이렇게 영향력있는 화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 지금의 반 고흐가 '반 고흐'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의 상당 부분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와 테오 부인의 노력일 것이다.


'고흐'하면 떠오르는 그림들은 작품의 주제보다는 색채, 표현방식 등 그림 그 자체에 중점을 둔 그림들이다. 하지만 1785년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린, 성경과 그 옆에 모던 라이프의 표상이었던 에밀 졸라의 <La joie de vivre>를 그린 '성경이 있는 정물'은 꽤 신선했다. 그리고 그가 시골에서 도시 Antwerp로 떠났다는 이야기는 그림 자체보다 더 예술적이다. 미술관에서는 새로운 이야기를 알아가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고흐가 일본 미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단순히 영향을 받았다. 기 보다는 훨씬 좋아한 것 같지만. 그가 직접 일본의 작품을 모사한 그림도 있고, 일본풍으로, 선을 그린 풍경화도 있다. 신기했다.


작은 줄 알았던 미술관을 보는 데 4시간이나 걸렸다. 아침은 먹은지 6시간이나 지났고 배는 이미 허기조차 잊은 듯하다. 미술관 밖을 나와 옆 공원으로 갔다. 푸른 잔디밭 위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여행에 락앤락 통은 필수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전자레인지만으로도 해 먹을 수 있는 요리가 꽤 있고, 그 요리들을 락앤락에 담아 끼니를 해결하면 식비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마트의 물가는 정말 싸기에!


점심을 먹고 향한 곳은 하이네켄 박물관. 더블린 기네스 스토어만한 규모는 아니었지만(기네스 스토어는 공장과 같이 있다.) 직접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들이 있어 재밌었다. Ez2dj같은 게임이라던지 친구들과 자전거 타는 영상을 찍어 메일로 보내준다던지. 심지어 플스도 있었다. 피파인지 위닝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유럽에서 즐긴 첫 게임이었다.


맥주의 맛은 so so. 더블린에서 기네스를 마셨을 때의 감동은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 걸로 만족. 오늘은 4박5일의 네덜란드 일정 중 돈 쓸 각오하고 저녁을 먹기로 한 날. 스테이크가 정말 맛있다는 친구의 추천을 받은 레스토랑으로 갔는데, 이런. 무려 한 시간 반을 웨이팅하란다. 롯데월드서 놀이기구 탈 때 말고 기나긴 사람의 행렬 속에서 이토록 오래 머물렀던 적이 있던가. 그래도 추천받은 음식점. 일단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되겠지. 라고 호기롭게 야외 테이블에 앉았는데, 정말 한 시간반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4명이 둘러앉아 초성게임을 한 덕에 지루하진 않았다. 드디어 우리 차례. 쌀쌀한 바람 속 긴 기다림의 결실을 맛보리라 다짐한 뒤, 두 종류의 스테이크와 머쉬룸 샐러드를 시켰다. 스테이크는 so so. 맛있었지만 인생 스테이크. 라고 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스테이크보다는 머쉬룸 샐러드가 더 기억에 남는다. 숙주를 넣고 태국식으로 볶은 양송이. 매콤한 맛도 살짝 난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 들어온 음식점을 20분만에 나가 홍등가로 향했다. 암스테르담은 길마다 운하와 짧은 다리가 있는데, 물에 비친 짧은 가로등이 출렁이는 모습이 너무 낭만적이었다. 골목골목 시끌시끌 하다가도 다리에 서면 네덜란드 소도시 특유의 고즈넉함이 전해진다. 신기하다. 가만히 운하를 바라보며 앉아있고 싶었지만, 아직 날이 쌀쌀하고 일행이 있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번에 암스테르담에 혼자 올 땐 꼭 이 낭만을 여유롭게 즐겨야겠다. 파리의 밤을 즐기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파리보다 더 낭만적인 풍경이라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빨간 빛과 수많은 관광객들이 보인다. 붉은 빛을 따라 가 보니 각각의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각 방에는 침대와 반라의 여성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여성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심지어 유혹의 제스쳐를 취하는 여성도 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연예인들에게 느끼는 그 대단함보다도 더.


한 남성이 붉은 방의 문을 열고 여성에게 속삭이는 모습을 봤다. 긴장한 목소리로 "How are you?" 라고 말하던 남성이 방 속의 여성과 몸을 섞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 파르르 떨리던 그 입술이.


한 낮의 암스테르담 거리가 그 나름의 분위기와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밤 또한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한 달 정도 유럽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이 있다면, 여행의 마지막은 암스테르담에서 보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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