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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리 Sep 17. 2016

우리는 왜 타인을 깎아내리는가.

놀이터에서.

“야. 야. 야.”

고래의 눈이 어디에 있는지 아냐는 노숙인 B의 질문에 대한 노숙인 A의 답이었다. 이어서 A가 말했다.

“너 갈치 잡아 봤어?”

B가 대답했다.

“당연히 잡아 봤지. 내가 배를 얼마나 오래 탔냐면~”

B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A가 치고 들어왔다.

“지랄하고 있네.”


 바람을 쐬러 잠시 동네 놀이터로 나와 들은 대화의 내용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갈치가 고등어보다 맛있다, 한치의 눈이 오징어보다 크다는 사실을 아느냐, 한치가 오징어보다 맛있다.’등의 이야기를 논쟁적으로 이어갔다.


 가을이 되어 높아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니 뒤에서 진행중인 이야기가 더 잘 들린다. 그들은 ‘누가 더 많이 아느냐’로 싸우는 듯 보였다. 서로의 호칭 끝에 무조건 욕을 붙이는 화법이 인상적이었는데 상대를 도발하기 위함인지, 일상 화법인지는 모르겠다.


 보통 노숙인들이 시비를 걸면 무조건 피하라고 한다. 그들은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는 건 잃을 게 있는 사람 쪽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오늘의 싸움을 보며 그들은 잃을 수 없는 강한 자존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벌개진 얼굴로 침을 튀겨가며 “고래가 어떻게 우는지 아냐고!”라고 고함칠 때는 강력한 생의 의지마저 느껴졌다.


 5년 전까지 활발히 눈팅을 했던 디시인사이드의 키배(키보드배틀)이 떠올랐다. 각 갤러리마다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키배가 일어나는 매커니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그 인터넷 커뮤니티는 부정적 이미지로 ‘낙인 찍힌’ 집단이기에 유저들은 서로를 무시하고 얕잡아본다. 자신도 그 집단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래서 논쟁적인 떡밥이 나오면 ‘내가 너희보다는 낫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아’라는 강한 자신감이, 많은 유저들의 글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누군가가 자신의 글에 태클을 걸면 ‘감히 너 따위가?’라는 욱한 감정이 발동하고 격렬한 키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키배의 전개는 노숙인들의 말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논리보다는 목소리 크기(넷상에서는 쿨한 척하며 상대를 비꼬는 데 중점을 둔)를 앞세우고 인격 모독이 주된 무기다. 사실 오늘의 노숙인들의 대화처럼 싸울 이유가 전혀 없는(갈치가 고등어보다더 맛있다 등의) 이유로도 많이들 열을 올린다. 애니 갤러리에서는 ‘어떤 애니캐릭터가 더 예쁘냐.’를 가지고도 자주 싸운다.


 왜 그들은 상대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일까. 아니, 왜 ‘우리는’ 상대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일까. 그 결과로 얻는 건 무엇인가. 승리감? 존재의 이유? 왜 상대를 짓누르고 올라서는 데서 존재의 이유를 찾을까. 아마 거시적 원인은 대한민국이 ‘무한 경쟁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패배는 악덕이다. 그렇기에 큰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작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발악한다. 위의 두 집단(노숙인, 디시인)에서 알 수 있듯 패배자 혹은 하층민으로 취급받는 사람들은, 사소한 승리를 통해서라도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는다.(디시인은 다양한 계층이 존재함에도 사회적 인식을 고려했다.) 

 

 이제는 모두가 과한 경쟁의 잔인함을 안다. 더 이상 승리만으로 존재의 이유를 느껴서는 안 된다. 내 옆의 동료는 협력의 주체가 되어야지 경쟁의 주체가 되어선 안 된다. 사회, 제도, 일상 모든 부분에 인간성의 회복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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